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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의 걸작 Aug 02. 2023

교양인이라는 착각

대한민국의 공연예술 관람문화를 돌아보며 (2022.7.29의 글)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서 엘자는 자신을 구해준 기사 로엔그린과의 약속을 깨고 그의 정체를 묻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고 만다. 엘자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로엔그린은 힘을 잃고 그의 곁을 떠난다. 엘자는 뒤늦게 후회하지만 로엔그린은 강물을 따라 떠나버렸다. <로엔그린>의 주된 주제는 어리석은 인간의 욕구와 그로 인한 되돌릴 수 없는 잘못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스스로의 어리석은 결정으로 인해 후회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의 주도권을 인스타그램에 위임하며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고 노예가 되었다. 자아 정체성과 판단의 기준도 인스타그램으로 넘어가 그들은 남들이 열광하는 것에 열광하며, 남들이 말하는 인간상을 좇는다. 그들은 수많은 팔로워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힘겨운 노역에 봉사한다. 이 혁신은 우리의 아름다운 옛 삶을 앗아갔다. 첫 문장을 쓸 때의 감흥도, 아름다운 구절이 주는 전율도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책은 의미를 잃었다. 사람들이 책을 전시하는 것에만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여줌'의 삶을 살고 있다. 인스타그램 속 사람들은 스스로가 가치있는 사람이며, 남들에게 귀감이 되는 삶을 살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어릴 적 나는 멋모르고 이런 메시지를 전파했었고, 멋있는, 우월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남들이 쉽사리 할 수 없는 것을 찾아 헤맸다. 이런 바보같은 생각으로 나의 첫 꿈을 키웠다. 흔히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깔보듯, 나는 내가 '교양인'이 된 줄만 알았다.


얼마 안 가 우월함을 주장하는 것이 의미없음을 알게 되며 나는 관조의 태도를 가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헛짓거리에 곧 흥미를 잃게 되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오만은 내가 보기에는 가장 흔한 결함이야… 오만이란 실제로 아주 일반적이라는 것, 인간 본성은 오만에 기울어지기 쉽다는 것, 실재건 상상이건 자신이 지닌 이런저런 자질에 대해 자만심을 품고 있지 않은 사람은 우리들 가운데 거의 없다는 것이 확실해. 허영과 오만은 종종 동의어로 쓰이긴 하지만 그 뜻이 달라. 허영심이 강하지 않더라도 오만할 수 있지. 오만은 우리 스스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더 관련이 있고, 허영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것과 더 관계되거든.”


자신의 대단함을 남의 결함을 통해서야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주관이 온전하지 않은 불안한 사람임을 알게 된 뒤로 나의 과시는 힘을 잃었다. 그 이후로 관조적 태도를 갖게 되며 나는 오만과 허영을 조금이나마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이해할 수 없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순수학문을 배척하고 실용성을 효용, 선악, 시비의 절대적 기준으로 상정하면서도 남들과 차별화되는 교양을 요구한다. 그래서 우리 세대의 주류는 한편으로는 순수함을 힐난하다가도 맹렬히 추종한다. 이러한 모순에는 부끄러움이 없다. 그들은 '부끄러움'의 정의마저도 순수학문의 잔재로 간주해 폭력적으로 파괴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허영은 죄악이다. 그들은 삶의 생생한 부분을 제거하여 자신의 최고의 모습만을 전시한다. 그들이 설정한 잘못된 가치에서 스펙타클이 만들어진다. 그들이 창조한 스펙타클은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며, 자아관마저 바꾸어 버린다. 그들이 소셜 미디어에 게시하는 내용들이 곧 내용의 무상함을 정당화해준다. 허위욕구를 조장하고, 그들에게 감화되지 않는 사람들이 스스로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게 한다. 적어도 현대사회에서, 허영은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다. 실체 없는 경쟁의 촉매제이기 때문이다.


최근 뮤지컬계의 논란으로 재점화된 우리나라의 뮤지컬 관객 문화도 비슷하다. 우리나라의 뮤지컬 공연장은 소설 《1984》의 디스토피아를 연상케 한다. 서로가 각자의 일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규율을 위반하면 어디에선가 강력한 힘이 개입하는. 관객들은 소리를 내어서도, 기침을 해서도, 웃긴 장면에서 웃어서도 안 된다. '고급'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만족을 위해서.


뮤지컬을 '고급' 문화와 연관지으려는 움직임이 있다. 나는 이것에 반대한다. 브로드웨이와 웨스트 엔드에서도 관객들은 열렬히 자기의 감정을 표출한다. 웃긴 장면에서는 다같이 웃음을 터트리기도, 지나가는 장면에 감상을 덧붙이기도 한다. 심지어 그들에게 있어 '고급' 문화의 모델인 오페라도 지금의 뮤지컬처럼 경직되진 않다. 카라칼라에서 상연된 <카르멘>에선 관객들이 공연 중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휴대폰으로 무대를 촬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만 정숙과 고요가 타인에 간섭할 권리를 주는 관람의 제1원칙이 된 것처럼 보인다.


개탄할 일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더 나아갈 수 없다. 남들의 허영을 들춰내어 모욕을 주는 것 또한 허영일 뿐이다. 조소는 최악의 태도이다. 교양이 흘러넘친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인 스펙타클의 지배에 대응하는 방식이 고작 스펙타클의 매개인을 직접 공격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스스로에 취해 세상을 보지 못하는 까막눈임을 온세상에 알리는 멍청한 사람들이다. 조소와 우스움은 다르지 않다.


과시적 삶의 단편인 '교양'은 매혹적인 단어이다. 교양인이라는 착각이 터무니 없는 원칙을 낳는다. 교양이라는 이름이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게 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모두가 교양에 매달린 까닭이다. 이해하지도 못하는 책을 펼쳐 가장 어려워 보이는 부분을 찍어 올리는 경우도, 자신의 노력을 자랑하는 경우도, 일반 관객들을 통제하려는 경우도 궁극적으로는 '교양'이라는 매력적인 단어에서 기인한다. 교양있는 사람은, 고상한 사람은 말이 없다. 그들의 앎은 한없이 깊으며, 그들의 마음 또한 많은 이를 포용할 만큼 넓다. '교양인'의 이러한 특징은 무시한 채 자랑의 수단으로서 교양을 찾는 것은 우매함의 현시일 뿐이다. 불순한 의도로 순수한 앎을 좇는 것은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모순이다. 소셜 미디어가 구축한 파생실재는 워낙 견고하여 이 세계에서 벗어날 별다른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은 스펙타클에 무력하다. 그 와중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을 테니 나는 관조적 태도를 지키고자 한다. 멀리서는 많은 일들이 한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교양이라는 착각의 미명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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