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똑똑이, 가(짜) 똑똑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 단어가 설마 나 자신에게 해당하는 단어일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학교에서 그래도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고 교사로 발령받은 후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반대학원(교육대학원을 선택하지 않아서 잘 다니던 공립학교에 사표를 제출해야 했음)에 진학하여 교수의 꿈을 꾸며 열심히 학문에 매진하는 나 자신이 나는 대견했고 자랑스러웠다. 친구들이 다 중, 고등학교에서 인생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인 선생님으로 안정적이지만 지루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때, 나는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는 설렘과 기대감, 약간의 불안감과 함께 흥분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머리에 지식은 많은데 삶의 지혜가 없는 사람, 이런 유형의 사람을 가리켜 사람들은 헛똑똑이라 하는데 지금 돌아보니 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 한창 논문을 쓰고 있을 때였다. 조교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5월 마지막 주, 감기 기운이 있어 집에서 하루를 쉬고 있었다. 그 날, 아는 분으로부터 온 전화 한 통화로 인해 나는 내 인생에서 내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게 되었다. 한 남자가 서울에서 갑자기 내려왔는데 그 사람에게 소개해주려 한 내 친구가 알고 보니 아무도 모르게 약혼을 했다고 했다. 그러니 제발 시간만 때워주면 고맙겠다는 그분의 간절한 부탁이었다. 엄마와 너무 친한 분의 부탁이기에 거절하기도 미안해서 정말 편치 않는 몸과 마음으로, 그리고 뜨거운 생강차나 한 잔 마신다는 기분으로 가볍게 나가서 한 남자를 보았고 그리고는 그를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그런데 계속된 연락과 학교로의 찾아옴, 양쪽 집안의 엄마들의 만남 등이 정신없이 논문 쓰기에 바쁜 나를 중심에 두고 파문이 일듯이 점점 행동반경이 넓어지고 있었다. 난 아무런 요동 없이 중심에 있을 뿐이었는데 내 주위의 파문들이 나를 삼킬 줄이야. 급기야 엄마는 그 사람과 결혼하면 좋겠다는 말로 나를 은근히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결혼보다 나의 신경을 더 건드린 것은 엄마가 전혀 밥을 드시지 못하시는 것이었다. 엄마는 원래 신경이 예민하셔서 어떤 일이 마음에 있으시면 전혀 밥을 드시지 못하시는 체질이셨는데, 그럴 경우 좋지 않은 건강이 더욱 약해지셔서 온 식구의 걱정거리가 되시곤 하셨다. 그 남자에 대한 나의 생각은 첫 만남 후 4개월 기간 동안 8~9번 정도 본 후라 싫지도 좋지도 않은 그냥 무덤덤한 상태였다. 그런데 밥을 못 드시는 엄마의 몸은 점점 안 좋아지셨고, 그 남자 쪽 집안에서는 따뜻한 집밥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하니 빨리 결혼하기를 재촉하였고, 논문 쓰다가 정신없이 '응응, 그래 엄마 알겠어'라고 한 말로 인해 결혼식날이 10월 1일로 정해져 버릴 줄이야 생각지도 못 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여동생이 몇 개월 전에 결혼했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선지식이 있어서인지 모든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있었다. 논문 때문에 꼼짝 못 하는 나 대신에 밥 문제를 가진 양가 엄마들은 여동생이 한 반지와 똑같은 반지, 똑같은 한복, 똑같은 미용실 등으로 준비 완료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나의 성향으로 인해 논문에 빠져 별 생각이 없던 내가 번쩍 정신이 든 것은 정말 결혼식 일주일 전쯤이었다. '엄마, 이 결혼식 꼭 해야 돼? 아님 좀 미루면 안 돼? 나 지금 정말 논문 때문에 정신이 없는 거 알잖아? 아니 누가 이렇게 일을 진척시켜 놓았어?' 아니 무슨, 이런 결혼이 다 있나 싶어 정신없이 부인했지만 진행이 너무 많이 되어 있었고, 또 엄마가 꼼짝없이 드러눕는 모습에 덜컹 겁이 났고, 별로 연애를 해 본 적도 없던 나에게는 결혼의 개념조차 잘 알지 못했고, 또 강하게 나의 주장을 밀어붙이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그런 헛똑똑이였기 때문에, 10월 1일 나는 결혼식장에 서 있었다.
그 날 나의 모습이 나 자신에게도 낯설고 어색했고, 내가 잘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신감도 없었고 앞으로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으로 뒤범벅된 결코 행복하지 않은 결혼식이었다. 그렇게 나는 밥을 못 드시는 엄마 때문에, 또 며느리가 들어와서 귀한 자기 아들 따뜻한 집밥을 해 주기를 원하시는 시어머니 때문에, 바쁜 와중에 시간을 내어 결혼식의 하이라이트, 신부의 자리에 서 있었다.
쉘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서(The missing piece)"란 그림책을 아는가? '한 조각을 잃어버린 이 빠진 동그라미는 한 부분을 잃어버렸다는 그 생각 때문에 행복하지 않아서 길을 떠난다'라는 문장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뜨거운 햇살, 차가운 눈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벌레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꽃을 만나 향기를 맡기도 하면서 '그렇게 꿈결같이 행복한 나날이었네'라고 표현하고 있다. 나는 이런 자유로운 탐색의 시간을 나의 학문에서 누리고 있다가, 대학원 졸업 전에 한 결혼이 나에게는 너무 딱 맞는 동그라미가 되어서, 너무나 빨리 굴러가, 벌레를 만나도 멈춰 서서 이야기할 수도 없고, 꽃을 만나도 향기를 맡을 수 없고, 나비와 함께 어울려 놀 수도 없으며, 더더욱 행복한 노래를 부를 수가 없었다. 이 빠진 동그라미처럼 한 조각을 내려놓은 방법조차 또한 알지 못했다.
교사생활 3년 후 대학원 진학을 했기 때문에, 부모님이 보시기에는 과년한 딸이 시집을 못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많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이 딸의 결혼식을 해 치운 엄마는 이제 편히 밥을 드시고,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논문은 안중에도 없으신 듯 밥해주러 신랑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하셨다. 마침 논문 수정을 받는 기간이라 일주일에 한 번만 지도교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또 시어머니가 어찌나 무서운 분이신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논문 꾸러미를 들고 밥하러 갔다. 별로 밥을 해본 기억이 없어서 매일 절절 매고 있는데 시어머니는 저녁마다 '얘야 오늘은 뭘 먹었니?'라고 신랑에게 전화를 하셨다. 그렇게 일주일을 버티다가 신랑에게 도저히 논문을 완성할 수가 없어 친정에 잠시 가 있겠다고 말하고 짐꾸러미를 싸 들고 다시 돌아왔다.
겨우 논문이 통과되고 졸업식을 하고 국립대학교에 외부강사로 채용되는 일련의 시간들이 휙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밥해주러 신랑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때부터 나의 한 조각이 어떤 사람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우린 정말 완벽한 동그라미였다. 그는 게으르고 나는 부지런하고, 그는 어지럽히고 나는 정리쟁이고, 그는 별로 공부를 좋아하지 않고 나는 공부쟁이고, 그는 경제관념이 철저하고 나는 아니고, 그는 키가 크고 나는 작고, 심지어 그는 된 밥을 좋아하고 나는 무른 밥을 좋아하고. 우리 두 사람을 평균하면 딱 평범한 한 사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다른 무엇보다도 신랑집안의 철저한 경제관념, 즉 절대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절대 남으로부터 손해를 보지도 않는다는 생각이 우리의 동그라미를 진흙탕 속으로 굴러가게 했다. 몇 개월 먼저 결혼한 시누이는 바리바리 예물 단지를 시집으로 가져갔고, 그렇게 지출한 계산서에 비해 나로 인한 빈약한 수입은 이들의 마음을 언짢게 했다. 아마 지출비용을 잊어버리기 전에 빨리 수입비용을 받아들여서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로 만들고 싶어서 결혼을 서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부터 나의 모든 행동의 기준점은 시누이였다. 우리 딸은 이렇게 하는데 너는 왜 이렇게 하니로 시작된 시어머니의 간섭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순간까지도 계속되었다. 심지어 '그 아이는 이런 우유를 먹이던데 너는 왜 이런 우유를 먹이니'까지로 발전하였다. 시누이의 모든 행동은 절대 선이고 나의 모든 행동은 늘 기준점에 미달하는 부족함 그 자체였다. 그런데 시어머니의 그 기준점은 때로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느 봄날, 시부모님을 모시고 나들이를 가게 되었다. 마침 오셔서 시누이 부부와 함께 다녀오신 여행 이야기를 하시면서 '며늘아, 박서방 참 잘하더라. 어린 은희를 얼마나 잘 안고 다니던지 내 딸과 우리가 얼마나 편히 여행했는지 모른단다'라고 자랑하셨다. 그래서 나들이 도중에 나도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우리 딸 좀 안아주세요. 안고 있기가 너무 힘들어요." 남편은 시어머니의 눈치를 보더니만 "으응" 하면서 아이를 안았다. 그런데 시어머니께서 정색을 하시면서 말씀하신다. "얘야, 너의 신랑 팔 아프다, 네가 안 든 지 업든지 해라"
앤서니 브라운(Anthony Browne)의 "공원에서 일어난 이야기(Voices in the park)"란 작품을 아는가? 챨스(Chalse)와 엄마 고릴라는 부자가 살 수 있는 좋은 집에 살지만 마음이 맞지 않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공원에 산책 가서 의자에 앉은 두 사람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앉아있다. 심지어 엄마 고릴라는 우월의식이 가득하여 은근히 자신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을 경멸하고 무시한다. 아름다운 공원 속에 앉아 있는 엄마와 아들은 아무 대화 없이 각자의 고독 속의 세계에 갇혀있다. 그들은 마음의 목소리를 서로 듣지 못한다.
신랑은 삼남 삼녀 중 다섯째인데도 가족 구성원들에게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이다. 시어머니가 자신의 남편보다 더 귀히 여기며 애지중지하는 존재이고 두 형님들조차도 동생을 함부로 대하지 못 한다. 그는 이 가정을 일으킬 대들보로 일찌감치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서인지 가정의 잡다한 일에 도움을 줄 능력이 전혀 계발되어 있지 않았고 또한 그럴 마음도 전혀 없었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그 당시 아파트보다 단독주택이 더 많았던 시대로 난방을 위해 연탄이 활용되고 있었다. 밤에 자다가 일어나 연탄을 교체하러 나가는 일은 정말 성가신 일이다. 시집오기 전 나의 집에서의 연탄 갈기 주담 당자는 아버지셨다. 일남 이녀의 막내로 자유롭게 자란 나는 몸이 약한 엄마를 항상 도우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모든 남자는 여자를 돕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댁에서는 남자가 권위의 상징이었고 여자는 남자를 돕기 위한 보조수단쯤으로 여겨졌다. 명절날 친척들이 모일 때마다, 사람이 많아서인지 아님 여자는 으레 그렇게 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남자들은 다 상에서 밥을 먹고, 여자들은 상도 없이 방바닥에 몇 가지만 차려놓고 밥을 먹었다. 시집오고 처음 맞이 한 설날에 여자들은 하루 종일 전 굽고 국 끓이고, 반찬 만드느라 화장실 갈 틈조차 없는데, 남자들은 다 소파에 누워 티브이만 바라보는 진풍경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기억이 있다. 앞으로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이런 일을 되풀이해야 할까 하는 두려움에 눈 앞이 캄캄했다. 친정아버지는 또한 자녀들에게도 헌신적인 분이셔서 맛있는 반찬이 있는 경우 당신이 드시지 않고 오히려 우리들이 먹는 모습을 보시고 좋아하셨다. 그러나 시댁에서는 맛있는 반찬에 손대는 것조차 눈총을 받았다. 그 맛있는 반찬은 남자들을 위한 음식이었지 힘들게 만든 여자들을 위한 음식이 아니었다. 첫 명절에 친정에서 하듯이 금지된 음식인 줄도 모르고 몇 번 집어먹다가 싸늘한 시어머니의 눈총을 받고 나서야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혼 때에 힘들게 만든 반찬을 먼저 상에 차려 주고, 나머지 음식들을 정리한 후 방에 들어와 보면 신랑은 이미 맛있는 반찬을 혼자 다 먹어버려서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신랑은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었는데, 첫 명절을 지낸 후에야 그런 신랑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되기도 했지만, 완전히 상반된 가정 분위기 속에서 자란 신랑과 나는 사소한 일에도 다툴 수밖에 없었고 서로를 비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듯한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외면한 채, 대화 없이,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부부였다. 그리고 이런 결과에 대해 나는 친정아버지와 완전히 다른 신랑 때문에, 남편은 시어머니와 완전히 다른 나에게 그 원인이 있다고 굳게 믿으면서, 때로는 상대방을 경멸하고 무시하면서 우울한 세월을 흘러 보내고 있었다.
아서 요링크스( Arthur Yorinks)의 '헤이, 알(Hey, Al)'을 아는가? 그 그림책의 마지막 문장이 이러하다. "Paradise lost is sometimes Heaven found."
11월 세 번째 주, 일요일 새벽 3시로 기억한다. 온몸이 뜨거워 벌떡 일어나 보니 방에 불길이 스며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뛰쳐나왔다. 남편이 먼저 나와 있었다. 곧 다시 남편은 뛰어들어가 두 딸을 깨워 불길을 헤치고 나온다. 불이 났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었지만 우리 집이 불길 속으로 잠겨 들고 있었다. 아파트가 아닌 산 아래의 단독주택, 이제 건축한 지 딱 2년째인 새 집이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좀 멍해지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고 '어떡해, 어떡해, 불이 났어' 이 말만 계속하고 있었다. 도로 건너편 이웃집에서 소방서에 신고를 했나 보다. 불자동차가 앵~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그리고 우리 이층 집을 향해 물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앵~ 불자동차가 계속 온다. 근데 불이 꺼지지 않는다. 이층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저기 저 속에 내 옷, 내 책, 내 물건들, 그리고 아이들의 악기, 남편의 서류들. 이러한 것들이 눈 앞에서 불타 사라지는 모습을, 나는 아무런 대책 없이 '어떡해'만을 중얼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불구경도 구경이다.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불타는 모습을 지켜본다. 10대의 소방차가 왔는데도 불길이 잡히지 않는다. 급기야 물 호스는 우리 집을 향하지 않고 집 뒤의 산을 향해 물을 뿜어낸다. '아저씨, 우리 집은요?' '이 집보다 산에 불이 붙으면 이 동네 전체가 위험합니다' 주위에 둘러선 사람들은 안타가 워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한 집을 포기하더라도 동네를 살리겠다는 소방관들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저씨, 우리는 어떡해요'라는 말밖에 달리 할 저항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결혼 후 14년 동안 모은 모든 땀의 대가들이 한순간에 재로 변했다. 집을 건축하느라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 사용했기 때문에 화재보험에 들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은행에 저축 한 푼 없다. 남은 것이라고는 자다가 입은 대로 뛰쳐나온 나와 아이들의 운동복 한 벌, 팬티바람으로 나온 남편에게 앞집에서 건네준 운동복 한 벌. 이것이 가진 모든 것이다. 그런데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우리 집이 다 타버리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위로했다. '아이고 사람 무사한 것만 해도 큰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래 맞는 말이다. 재산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긴다고 하는데 사람 목숨은 절대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새로 생기지 않는다. 가장 소중한 것이 남아 있다.
정신이 조금 들어서 이웃집 사람의 전화기로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불났어. 다 탔어.' 엄마는 전화기에 대고 대성통곡을 하신다. '아이고 무슨 이런 일이, 아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래?' 엄마가 나 대신 한참을 우셨다. 그런데도 나는 그때 눈물이 나지 않았다. 아직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런데 10년이 훨씬 지난 뒤, 누군가에게 지난날의 우리 집 화재사건을 말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에는 왜 그렇게 주책없이 눈물이 흐르는지. 슬픔도 숙성되어 곰삭아서 터져 나오나 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엄청난 것들은 바로바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마음속 밑바닥을 흐르다가 화산의 용암이 분출하듯이 그렇게 높게 솟아오르는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합리화했다.
It never rains but it pours. 비가 오면 퍼붓는다 ( 설상가상) 남편이 직업을 잃었다. 아무것도 없는 맨주먹으로 다시 일어서려 할 때 한 주먹이 맥없이 꺾였다. 이 곳으로 이사 오면서 시어머니의 요구에 따라, 남편 뒷바라지 잘하기 위해 내 직업까지도 내려놓았는데, 하늘의 별까지도 딸만큼 기세 등등하던 남편이 하루아침에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되었다. 가만히 앉아서 명령할 줄만 알던 남편 밑에 이제 나와 두 딸만이 남아있다.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남편 때문에 기가 찼다. 중,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아침마다 손을 벌리며 돈을 요구했다. 참으로 앞이 막막했다. 주택건축 때문에 충분히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받은 터라 이제 더 이상 도움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나는 미친 듯이 이력서를 써서 학교로 보내기 시작했다. 내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경력단절이 12년이나 되었고 이제 40대 중반에 들어선 아줌마를 누가 선생으로 채용할 것인지 내가 생각해도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했나. 50여 통의 이력서를 학교에 집어넣은 후 거의 체념 상태에서, 그날도 역시 교육청 홈페이지를 뒤적대고 있었다. 그런데 한 교육청의 구인란에 영어 기간제 교사 모집이 있었고, 그 지역은 아주 시골 골짜기였다. 이젠 아무리 보내어도 응답 없는 이력서 대신에 거의 자포자기 상태에서 전화를 했다. 그런데 그 학교의 교감선생님께서 전화를 받으셨고 사는 지역이 어디냐고 물으시고는 이력서를 써서 다음날 가져오라고 하셨다. 괜히 사람 오라 가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반, 기대 반을 가지고 다음날 처음 가는 그 지역을 남편과 함께 갔다. 그때가 2월 마지막 주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교감선생님께서 내일부터 나와서 일을 배우라고 하신다. 그리고 본인은 바로 우리 옆 동네에 살고 있는데 한 일주일간만 같이 카풀할 수 있는지를 물으셨다. 본인의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수리 중이라고 하시면서.(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때 교감선생님은 음주운전으로 운전면허정지 상태였음. 며칠 후, 새롭게 발령받아오신 남자 선생님이 마침 우리 지역에 사셔서 바통터치가 기적적으로 이루어짐.)
그렇게 3월 개학이 시작되려는 시점에 나는 영어교사 반, 운전수 반으로 다시 사회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정말 신기했다. 전 학년이 몇 반밖에 없는 작은 학교였지만 나를 다시 학교현장으로 이끌어준 고마운 학교로, 몇 명 되지 않는 선생님들은 기꺼이 나의 부족한 부분을 가르쳐 주셨다. (사실 너무 작은 학교여서 한 교사가 자신의 몫을 감당하지 못하면 학교가 마비되기 때문에 열심히 가르쳐 주신 부분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작은 학교에서 학교생활을 출발했기 때문에 일을 완전히 배울 수 있는 행운이 있었음을 또한 고백한다. 지금도 그 선생님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완전히 새로 바뀐 교육시스템을 배워가면서 그 먼 길을 오고 가는 것이 행복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 있는 나를 구해준 그분들이 정말 너무 고마워서, 학교에, 그리고 학생들에게 나의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존 버닝햄(John Burningham)의 "지각대장 존(John Patrick Norman McHennessy The Boy Who Was Always Late)"이란 책을 아는가? "And John Patrick Norman McHennessy set off along the road to learn."이란 문장이 되풀이되어 나온다.
인생이란 끊임없이 배우는 과정이다. 그 배우는 과정(인생)을 위해 우리는 쉼 없이 길을 떠나야 한다. 때론 인생길에서 악어에게 가방을 빼앗기고, 사자에게 엉덩이 부분의 바지를 찢기고, 조류에 휩쓸려 떠내려갈 뻔하고, 또 믿어주고 도와주리라 생각한 사람들에게 불신받고 부당한 일을 당하여도, 우리는 끊임없이 인생길을 가야만 한다.
가정일의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남편이 이제 설거지를 한다. 그리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던 마음으로 가득했던 나도 이제 어려운 사람들의 형편을 마음 깊이 공감하며, 할 수 있는 한 돕고자 노력한다. 대학 다닐 동안 한 번도 학비와 용돈을 부모로부터 지원받지 못했던 아이들은 서너 개의 파트타임 잡을 하면서 학교를 졸업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더니 아이들은 세상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강인한 아이들로 성장했다.
너무 힘들고 어려웠던 때 나는 이 시를 종종 읊조렸다.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고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늘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고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너무 힘들었던 결혼생활과 난데없이 찾아온 화재, 그리고 엄청난 경제적 결핍과 생활고 때문에 결혼 후 한 번도 행복했던 적이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이제 주말이면 남편과 등산을 한다. 남편은 아직도 뚜렷한 직업이 없지만 가정을 사랑하고 몸으로 돕고자 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에 감사하고 있다. 언젠가 한 번은 남편이 너무 얄미워서 밤중에 자고 있는 남편의 빰을 세게 후려친 적이 있다. 남편은 깜짝 놀라 깨어나면서 "왜, 왜? 무슨 일이 있어?"라고 나에게 물었다. 나는 시치미를 떼고 남편에게 말했다. "아니, 파리 한 마리가 계속 윙윙대고, 마침 자기 뺨 위에 앉았길래 잡는다는 것이~" 그렇게 빰 한 대를 때리고 나니 속이 좀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신혼 초에 나의 갑작스러운 결혼을 안타가 워 하시던 어느 친척분이 나에게 이렇게 살며시 말씀하셨다. '결혼이란 정원을 가꾸는 것과 같아. 힘들지만 돌멩이 파 내고 잡초 뽑고 가꾸다 보면 아름다운 정원을 보게 될 거야. '라고 하신 말씀이 이제 조금 이해가 된다. 처음부터 화려한 정원, 누구나 부러워하는 정원도 있을 수 있겠지만, 땀 흘리며 고통하면서 일꾼 정원에서 이름 없는 들풀이라도 사시사철 꽃을 피워준다면, 보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는 아름다운 정원이 되지 않을까?
'결혼이란 어떻게든 그냥 살아내는 것'이라고 믿어온 헛똑똑이었기에 '그렇게 험한 세월을 참고 이겨내려고 노력하다 보니 쓰러지지 않고 이나마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되었나 보다'라고 나는 나 자신을 위로한다. 살아온 날들보다 이제 살날이 더 짧아진 지금, 나는 주말마다 힘든 산을 오르내리며, 인생의 산도 이처럼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그 와중에서, 이제 잠시 멈춰 서서, 벌레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꽃을 만나 향기를 맡기도 하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됨에, 그리고 남편과 함께 인생의 한 방향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됨에, 그리하여 서툴지만 함께 삶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음에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큰 딸은 직장문제로 힘들어하고 있고, 둘째 딸은 삶의 새로운 방향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늘 문제가 우리 인생의 발목을 부여잡지만, 문제에 사로잡혀 주저앉기보다는, 문제와 더불어 씨름하면서, 해결할 수 있는 시점에서 해결하기를 원하고 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니까.
호주에 가서 찍어온 surfing 장면입니다. 인생이란 이런 위험한 파도를 끊임없이 타며 즐겨야 하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