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여기까지 왔어"

by 김해경

헤닝 만켈의 "이탈리아 구두"에 위의 대사가 나온다.


의사 프레드리코 벨린은 의료사고(어떤 여인의 아픈 팔을 잘라야 하는데 멀쩡한 팔을 절단하는 사고)를 저지른 뒤 할아버지, 할머니가 일평생 산 작은 섬에서 지독히 단조로운 삶을 12년간 살아간다.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끼는 유일한 순간은 핀란드의 그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얼음을 깨고 그 구멍으로 들어가 있을 때이다.


그런 그에게 40년 전의 연인이 갑자기 찾아와, 옛날에 했던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면서, 그의 삶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하얀색 옷을 입는 웨이터인 아버지의 굴욕적인 삶이 싫어, 하얀색 가운을 입는 의사로 신분 개조에 성공한 그이지만, 그는 궁핍한 삶 때문에 늘 힘들어하는 부모님의 모습 때문인지, 누군가의 인생을 책임지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젊은 시절, 그렇게 서로 사랑했지만 연인 하리에트를 버리고 미국으로 도망쳤다 돌아온 그는 별로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못하며, 그 후 두 번의 결혼생활도 순탄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하리에트가 보행보조기에 몸을 의지한 채 이 황량한 섬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연애시절 프레드리코가 종종 이야기해준 연못(어릴 때 프레드리코가 놀던 곳)으로 함께 가기를 요구한다. 40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지못해 떠난 여행은 결과적으로 프레드리코를 다시 삶으로 돌아오게 하는 출구가 된다. 하리에트에 의해 '루이제'라는 딸의 존재를 알게 되고, 곧이어 실수로 팔을 절단했던 여인과도 만나 용서를 구하며 화해하게 된다. 그 자신 스스로를 가둔 쇠창살이 하나씩 허물어지면서, 그는 출구를 찾지 못했던 자신의 12년간의 삶을 애도하고 저주한다.


저녁 파티를 성대히 치른 후, 며칠 지나지 않아 하리에트는 죽고, 마지막 장면에서 프레드리크는 늘 방치해 놓았던 식당의 개미집(식당 대들보를 거의 먹어치우고 있다)을 드디어 집 밖으로 퍼낸다. 그러다가 하리에트가 버린 술병 속에서 젊은 시절의 사진과 함께 "우리 여기까지 왔어"라는 글이 적힌 종이조각을 발견하게 된다. 프레드리코는 오랫동안 그 사진과 글을 들여다보다가 이렇게 중얼거린다.

"더 가지는 못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다."


프레드리코 주위에는 늘 죽음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함께 있던 개가 죽고, 다음은 고양이, 다음은 '시마'라는 가출한 여자아이, 그다음은 연인 하리에트. 그런데 늘 헤어진 구두를 신고 있던 프레드리코에게 딸 루이제에 의해 이탈리아 장인의 새 구두가 마지막 장면 전에 배달된다. 발에 아주 잘 맞는 구두를 신고, 프레드리코는 매일 부엌을 몇 바퀴씩 돌아본다. 이는 새로운 삶에 대해 나아갈 준비가 되어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프레드리코와 같이 극적인 사건을 겪지 않더라도 일평생 끌고 다니는 슬픔이나 불안, 두려움과 같은, 심령을 갉아먹는 개미집 같은 존재가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있을 수가 있다. 프레드리코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 개미집을 퍼내면서, 우리에게도 '이제는 퍼내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늙는다는 것은 주위에 아무런 관심도 없고 새로울 것도 없는, 그래서 오늘은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과 같으리라는 죽음과 같은 정적만이 있는 곳인데, 이에서부터 타의에 의해 벗어 나오게 되었지만, 이제는 새 삶을 준비하는 프레드리코에게 나는 "브라보"와 함께 힘찬 박수를 보내고 싶다.


팔이 절단됐던 앙네스 말이 기억에 남는다.

앙네스는 프레드리코가 사는 섬을 방문하고, 그 섬의 아름다움을 보고 난 뒤, 프레드리코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어요. 더 이상 박수를 칠 수 없다는 거지요. 마음속으로 환호성을 지르고, 손바닥을 서로 부딪쳐 그 환호성을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권리예요."


나 자신에게, 그리고 내 주위에, 삶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나는 "브라보"와 함께 힘찬 박수를 보내는 일들이 날마다 많아지기를 간구해 본다.


또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남편에게, 가족에게, 주위의 친지들에게 "우리 여기까지 왔어"라고 웃으며 말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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