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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경 Feb 22. 2023

'내 나이가 어때서!'

'안 돼! 나이 들고 키가 더 커야 돼!' '어때서!'로 매달리는 손자

아시는 분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서울까지 조문을 다녀왔다. 마침 내가 사는 곳에서 그 장례식장을 통과하는 버스가 있어 다행이었다. 거의 서울 갈 일이 없는지라, 그 대학병원의 이름으로 불리는 정류장에 내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병원 위치를 다시 물어 확인한다. 

"도로를 건너서 조금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서, 조금 더 올라가면, 그 대학병원의 장례식장이 나옵니다. 저기 그 대학병원의 간판이 보이죠?"

정말 건너편 하늘을 쳐다보니 많은 간판들 중에 한 간판에 그 대학병원의 이름이 적혀있다.

"네, 보이네요."

"아주 가까운 것 같지만, 좀 걸어가셔야 합니다."

친절한 안내이다. 나와 남편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장례식장을 향해 바쁘게 걸음을 옮긴다.

"오전 10시에 발인이라고 부고장에 적혀 있었어. 지금이 9시 35분이니까 조금 여유가 있어."

남편은 시계를 보며 나에게 말한다.

그런데 생각보다 거리가 멀지는 않다. 가르쳐주신 분은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했는데 '시간이 걸릴 거라'는 말의 예방주사를 미리 맞아서인지, 오히려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가르쳐준 사람의 말이 참 지혜로웠구나.'

가깝다고 했으면 좀 먼 거리일 수 있다. 그럼 속으로 '뭐야? 그 사람 엉터리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한 먼 거리라고 하기에는 가까운 거리였다. (어쩌면 멀고 가까움의 상대적 인식차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멀다고 한 말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가깝구먼!'이란 반응을 가져왔다.) 


장례식장에 들어가니 벌써 시신을 운구할 채비를 하고 있다. 발인이 다 끝난 상황이었다.

'아니, 10시라고 적혀있던데.'(이별인사가 짧고 굵게 끝난 모양이다.)

상주를 만나 위로금을 전달하고 인사를 했다. 먼 길을 오셨다고 고마워한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맞는 말이다. 경계선을 넘어온 것이니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운구차가 떠나는 것을 본 뒤, 우리는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간다. 장례식장에 머문 시간은 거의 15분 정도이다.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과 이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 간의 이별은 이처럼 황망하고 헛헛하다. 그러나 고인이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돌아가셨다니, 남은 자에게는 큰 기쁨이고 위로이다. 버스 정류장에 거의 80대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앉아 계신다. 옷차림이 예사롭지 않다. 이 추운 날에(2023년 2월 22일 오전 10시 25분경, 영하 2도의 날씨) 하얀 스타킹을 신으시고, 원피스 모양의 외투에 굵은 가죽벨트를 하시고, 머리에는 자주색 비니를 쓰고 계신다. (의상자체는 너무 예쁜데, 비니 아래의 얼굴은 주름투성이다.)

 "옛날에, 즉 젊었을 때 나 멋쟁이야. 나 지금도 멋쟁이고 싶어!"

이러한 내면의 외침이 그대로 풍겨지는 옷차림이다. 그런데 이런 차림의 할머니의 모습에서, 나이를 거스르고 싶은 인간의 본능을 보기 때문에, 애처롭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나이에 도전하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참 용감하시다고 해야 할지, 나는 잠시 결정의 혼란을 겪는다.


나 자신이 할머니와 오버랩된다. 

'나 아직 능력이 있어. 나 다른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거든.'

그런데 현실에서는 철옹성 같은 장벽이 나를 가로막고 있다.

젊은이의 눈에 비치는 나도 이 할머니처럼 옛날의 자신(별로 잘난 것도 없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모든 것에 자신이 없어진다. 그래서 쪼끔 괜찮다고 나 자신을 위로한다.)을 생각하고, 지금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겠다고 고집하고 있는 것인지? 그래서 그들도  나를 애처롭게 보는 건지? 아니면 나이의 장벽을 뛰어넘겠다는 나를 용감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버스가 왔다. 할머니가 같은 버스를 타시려고 한다. 잘 오르지 못하셔서 뒤에서 할머니를 조금 받쳐드린다.

할머니는 제일 앞자리 앉으시더니, 운전수에게 "00에 내려 주세요."라고 부탁을 하신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정말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벨소리에 할머니가 전화를 받으신다.

"응, 가고 있어. 곧 도착할 거야. 기다려!"

타신 지 얼마 되지 않으신데, 곧 도착할 거라는 말에 먼저 조금 웃음이 났다. 대화의 내용을 들어보니,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시다. '서울에서 경기도로' 참 대단하시다. 먼 길을 마다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면, 아주 보고 싶은 친구를 만나러 가시는 길인 것 같다. 

"운전수 양반, 나 00에 내려줘요. 초행길이라서."

몇 번을 부탁하신다. 할머니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나도 초행길이면, 맞게 가고 있는지, 올바른 정류장에 내릴 수 있는지, 늘 불안해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내리시는 정류장이 마침 우리가 내리고 나서의 다음 정류장이다.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할머니가 이제 좀 귀찮은지, 운전수의 반응은 영 신통찮다. '올라탈 때도 겨우 타더니만 내릴 때 잘 내리려나?' 운전수는 오히려 이것을 걱정하는 눈치이다.

"할머니(나도 할머니인데) 걱정 마세요.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시면 됩니다."

"아이고, 고마워요. 내가 이곳이 처음이라서."

이 할머니를 경기도까지 내려오라고 한 그 친구할머니는 더 꼬부랑 할머니인가? 그래도 몰에서 만나기로 하신 것을 보면 친구할머니도 거동을 하실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럼 이 할머니는 나처럼 아직도 본인이 젊다고 생각해서 '내가 내려올게'라고 큰 소리를 치신 것일까? 옷차림에서 보듯이 이 할머니도 '내 나이가 어때서!'의 생각 속에 살고 계시는 것일까? 


하나님이 부르시면 모두가 떠나야 하는 이 세상. 아침에 떠나보낸 고인도  '내 나이가 어때서!'의 생각 속에서 사신 것 같다. 나이 들어 보이지 않으려고, 또 건강한 육신을 유지하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애를 섰던가!


'내 나이가 어때서!'의 할머니가 친구들을 만나

"얘, 너는 안 늙는다.  어쩜 이렇게 옛날하고 똑같니? 너, 패션이 정말 쥑인다. 젊은이 뺨친다! 멋지다."라는 말을 듣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옷 속에 감춘 육신의 노쇠를, 버스를 타고 내릴 때도 잘 감추시기를 바란다.


여기 또 한 사람의 '내 나이가 어때서!'는 오늘 나 자신에 대해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현실의 여러 장벽을 받아들이고 주저앉을지, 아님 이마에 피가 날지라도 그 장벽에 헤딩을 해댈지. 심란한 아침이다. 

에버랜드에서 곰이 벌러덩 누워있길래 "얘, 너 왜 이러니?  좀 똑바로 앉아 있어야 하지 않니? 네 나이에, 체면이 있지."

라고 했더니, 곰의 대답, " 왜?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하는 것 같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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