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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경 Jul 21. 2023


딸맞이 준비하기

"엄마, 여기에서 못 먹어본 음식으로 해 줘."

한국에 오는 첫째 딸에게 무슨 음식을 준비해 놓으면 좋겠느냐고 물으니 되돌아온 답이다. '호주에서 못 먹어본 음식?' 여기에다 딸이 더 덧붙인 말은

"돼지고기 불고기, 순두부찌개 이런 건 호주에도 다 팔아. 그런 거 말고."

나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음식이름이 딸 입에서 술술 나온다.

"딸아, 그런 음식은 내 생각 속에도 없거든."


며칠 전, 아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 왈,

"요즈음 가지 반찬이 너무 맛있어요. 살짝 삶아서 굴소스에 마늘 좀 넣고 파 쫑쫑 썰어 넣고 먹으면 와! 정말 이런 대박이 없다니까요!"

그 사람이 너무 실감 나게 맛있다는 표현을 해서 그 장면이 내 머릿속에 계속 뒹굴대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

"가지 삶아서 무쳐줄까?"

딸이 꽥 소리를 지른다.

"엄마, 나 가지 싫어하거든."

딸의 고함소리에 갑자기 머릿속 데이터가 재정립되어

"아~ 내가 어제 총각무 김치를 담가 놓았어. 요즘 엄마, 완전 자연식을 추구하거든. 설탕, 소금 가급적 사용 안 해. 사과, 배, 양파 갈아서 밀가루풀(얼마 전, 찹쌀풀에 사과, 배, 양파를 갈아 만든 물김치를 몇 분에게 드렸더니만 몇몇 사람들이 '소금 좀 넣어야겠어요. 싱거워요'라고 입을 맞춘 듯 말해서, '소금 한 댓 박을 넣어야 하나' 갈등 중이고, 또 그중 김치 담기 경력이 나보다 많은 한 사람이 '겨울 김장에는 찹쌀풀이지만, 여름에는 밀가루풀 쑤야 하지'라고 해서 '김치도 계절 따라 풀떼기가 다르네~ 그래도 찹쌀이 영양가가 많지 웬 가난하게 밀가루풀을'이라고 속으로 고개를 쳐들다가, 그분의 '아이고, 저 나이에 아직도 애송이~'라고 하는 듯한 눈빛에 주눅 들어 영양가를 포기하고 딸에게 당당하게 밀가루풀이라고 외쳤다.)을 넣어 맛있게 담았거든. 그런데 너무 익을까 봐 지금 냉장고에 넣어 놓았어."

"엄마, 잘했어."

'너 직장 생활한다고 총각무 김치를 담그기는커녕, 김치가 비싸니 호주에서는 총각무 김치가 먹어보기 힘든 음식이었구먼.' 내심 흐뭇, 자신만만해서 딸을 쳐다본다.(화상통화 중)

"엄마, 그런데 나는 금방 담은 생김치를 좋아하고, 박서방은 익은 김치를 좋아해."

이 딸아이가 또 무슨 이따위 퀴즈를 내나? 지금 '호주에서 못 먹어본 음식'이란 퀴즈에 답을 찾느라 '그럼 저번에 내가 호주 갔을 때 무슨 음식을 먹었지? 별다른 것 없이 평소에 먹던 대로, 내가 만들어 온 식구가 다 먹었거든. 그럼 그때 안 먹은 음식은?'이란 문제에 답을 찾느라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또 뭐라고? 생김치, 익은 김치? 어느 장단에 춤을 추라는 거야?'

"야~ 이게 또 무슨 소리야? 그럼 생반, 익은 반 콤비? 양념반, 간장반 닭고기는 아는데 생반, 익은 반은 또 뭐야? 너는 냉장고에 넣어두고 먹고, 박서방은 반 덜어서 밖에 두고 먹든지!"


"엄마, 선물은 뭐 사가지고 갈까?"

이 센스쟁이 딸은 금방 화제를 바꾸어 내 기분을 엎(UP)시키려고 한다. 

"엄마는 다 필요 없다. 있는 것도 다 못 쓰고 죽을 판이다."

"엄마, 영양제는 있어?"


둘째가 사는 미국이나 첫째가 사는 호주나, 가게에서 웬 영양제들을 그렇게 빼곡히 쌓아놓고 팔고 있는지? 의료보험제도가 한국보다 후진 나라여서 약으로 모든 걸 때우려고 하는 그 불쌍한 나라에 나의 두 딸들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잠시 마음이 미어진다. 흑흑.


좀 젊었던 시절, "나 완전 건강체"를 외치며, 보내온 영양제를 거의 후진국의 쓰잘데 없는 물건 보듯 했었던 나, 그러나 세월에 장사 없는지라, 아플락 말랑의 임계점에서 왔다 갔다 하는 수준이 되니, 어쨌거나 그 두 나라는 의료보험이 열악해 약을 의지하는 국가이니, '그 약들에 한국보다 쪼금 더 연구하고 투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나이 들어 이제는, 아침으로 한 알씩 영양제를 입 속으로 털어 넣고 있다. 


호주의 의료제도가 어떤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며칠 전 일어났다.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호주에 워킹할러데이 하러 온 한국여자아이가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호주에 온 지 일주일 정도 되었을까? 청운의 꿈을 안고 와서 신발에 묻은 한국의 흙먼지를 털기도 전에 덜컥 병이 낫으니 본인도 얼마나 난감했을까?  영어가 전혀 안 되니, 딸이 그 아이를 케어하게 되었고, 장에 염증이 생겨 입원해, 수술해야 한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게 되었다. 딸은 호주의 어마어마한 진료비를 알기에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게 되었고, 아직 호주 의료비의 실정을 모르는 그 아이는 수술하겠다고 결정했다. 돈보다 먼저 건강을 챙긴 것은 분명히 현명한 처사! 어쨌거나 수술하고 하루 있다가 퇴원(총 이틀 병원에 있었음)했는데 비용이 7,668,628원!  호주 의료비의 매운맛을 오자마자 맛보게 된 그 아이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호루라기를 하나 사게 된 경우. 한국에 비해 훨씬 높은 인건비에 감지덕지하기보다 건강 챙기기가 오히려 돈 버는 길이라는 것을 절절히 깨닫지 않았을까? 다행히도 그 아이는 여행자 의료보험을 들어놓아서 나중에 어느 정도의 비용은 되돌려 받겠지만, 빚지고 시작하는 호주생활에 깜짝 놀라, 영양제, 비타민제,  피로해소제등 지천에 널려있는 약들을 챙겨 한 움큼씩 입에 쏟아붓고 있지나 않은지?


"나는 영양제도 아직 많이 남아있어!"

"아빠는? 뭐가 필요해요?"

"몰라. 지금 안 계셔."


딸은 코로나 시절에 한 온라인 결혼식으로 이번에 한국 오면 처음으로 시댁식구들과 대면하는 경우이고, 또한 우리 쪽 친가, 외가 사람들과도 만나다 보니 그들에게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가 고민 중 가장 큰 고민거리이자 골칫거리. 뭘 드려야 잘 받았다는 인사말을 듣게 될까? 외국에서의 한 번씩의 귀국은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이란 단어를 내동댕이치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아무거나 사 와라. 엄마는 초콜릿도 괜찮다."

"초콜릿은 좀~"

"맛만 있더구먼." 

저번에 나는 호주를 다녀오면서 초콜릿을 한 뭉치 사 왔다. 이리저리 나눠주고 남은 것을 먹어보니 혀에 살살 녹는 맛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국내에서 초콜릿을 거의 먹지 않는 나이기에 한국 초콜릿맛과 비교할 경지에 이르지는 못 했지만, 다양한 맛의 호주 초콜릿은 일단 나에게는 풍성한 미각을 제공하여 합격권이었는데, 딸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딸과 통화를 끝낸 뒤, '호주에서 먹어보지 못한 음식'생각으로 나의 머릿속은 복잡하다. 고기는 한국보다 훨씬 흔한 그곳. 일단 고기는 음식리스트에서 뒤 전으로 밀려난다. 


'아참! 멸치반찬을 해야겠네' 

호주에는 한국에서 먹는 것과 같은 멸치가 없다. 한국마트를 다 뒤져서 찾아낸 것은 가느다란 실멸치. 한국에서는 그런 멸치 같지 않은, 시답잖은 멸치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마트에 가서 재료를 고를 때 '딸이 이것을 먹어보았는지, 안 먹어보았는지'가 선택의 기준이 된다. 이 어려운 문제의 해답을 슬쩍 알기 위해, 딸아이의 머릿속에 잠시 퐁당 들어갔다가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골라낸 재료로는 고구마 줄기(절대 먹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딸의 음식에 대한 호불호는 그다음 문제이고), 열무김치용 열무(김치 담그기의 달인도 아닌데 김치에 자꾸 마음이 간다. '딸아, 네가 김치 담그기는 언감생심이니 엄마의 김치를 이 기회에 한번 듬뿍 맛보겠니?' 하는 엄마의 자존심을 건 음식! 괜히 가슴이 뛴다.) 골뱅이통조림(이건 한국마트에 있었던가?), 간장게장, 고추장게장을 위한 꽃게, 더덕무침을 위한 더덕 한 뭉치(이것도 틀림없이 먹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의 자랑인 동충하초 돈삼겹살과 갈비, 명란젓, 딸아이가 오매불망 먹고 싶어 하는 쥐치포와 반건조 오징어, 콩조림을 위한 검은콩, 갈치구이나 조림을 위한 제주도 은갈치. 오징어포 무침. 아이고, 평소보다 많이 담긴 담았지만, 이렇게 쉽게 휘딱 십만 원을 훌쩍 넘기다니, 돈의 굽이굽이 고개를 넘는 일이 아주 쉬워진, 현대 사람들이 자식보다 더 끼고 산다는 총애받는 카드, 네가 오늘의 주인공! )


낑낑대며 재료를 조리대로 옮기면서, 오늘 이 모든 반찬을 다하리라고 결기를 다지는데, 꼭 나의 결심을 무너뜨리는 작은 여우는 때맞춰 등장! 

"뭐 하니?"

"응, 언니야. 지금, 다음 주 월요일에 올 애 때문에 반찬을 만들려고 하고 있어."

"뭐라고? 다음 주 월요일에 먹을 반찬을 목요일인 오늘 미리 만들어 놓는다고? 안 된다! 날씨가 더워서 다 상한다!"

냉장고 신봉론자인 나는 단연코 외친다

"냉장고에 넣어놓으면 되지."

냉장고 불신론자인가? 언니는 더 크게 단언한다.

"냉장고에 넣어도 안 된다. 맛없고, 상한다"


언니의 몇 마디에 나의 결기는 눈 녹듯 녹아내리고, 나는 재료들을 냉장고의 이쪽저쪽 구석에 되는대로 쑤셔 넣는다.

'아! 반찬 만들기의 날짜를 언제로 잡아야 하나?'

많이 사온 재료들이, 사온만큼의 무게로 짐이 되고, 에고, 밖에 나가 음식을 사 먹을걸, 걸, 걸의 후회가 마음 한 구석에서 일어나려 하는 순간,  

"엄마! 얘 봐. 코끼리 소리 흉내 내는 것 좀 봐."

다시 온 화상통화 속에 손녀는 앙징맞게 코끼리 소리를 흉내 낸다.


손녀라는 존재가 모든 걱정, 근심을 말끔히 날려버리는 비눗방울 같은 존재일 줄이야!

'반찬아 걱정 마라, 내가 곧 너를 만들려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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