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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경 Jan 27. 2024

"한 군데, 한 군데뿐이야!"

날씨가 조금 풀려서 오래간만에 공원으로 산책을 갔다.


"나이 들면 갈 수 있는 곳이 한 군데, 한 군데뿐이야!"


지나가는 할머니(할머니라는 용어를 사용하기가 곤란하다. 나이 혹은 손자, 손녀의 유무에 따라 할머니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도 있을 것 같는데, 지나가는 이 할머니는 멋쟁이에다가 외관상 젊어 보여서 아주머니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그런데 본인의 입에서 '나이 들면'이라는 나이를 언급하니 할머니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나도 손녀 1명, 손자 2명이 있는 할머니라 '할머니'라는 호칭에 거부감이 없다. 그런데 간혹 남편이 마주 보며 '당신 많이 늙었어. 이제 할머니네!'라고 할 때는 할머니의 호칭이 갑자기 싫어진다.)


아주 똑 부러지는 음성으로 한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자, 옆에 같이 동행하던 할머니가

"그려!" 라며 어눌하게 답변한다. 그 답변하는 목소리의 색깔로 보아 이 똑 부러진 할머니가 말하는 그 한 군데에 한 50% 정도 동의하면서, 이 사람이 하는 말이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지를 좀 생각해 보는 눈치였다.


나는 지나쳐가는 그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몸을 휙 돌려 그 똑똑해 보이는 할머니를 붙잡고

"그 한 군데가 어디인가요?"라고 묻고 싶은 충동이 불같이 일어났다. 그러나 '무슨 이런 오지랖이 다 있나?'라고 할까 봐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래서 공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한 군데가 어디인지를 나는 내내 생각했다.


첫째, 공원이다. 왜냐하면 나는 공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고, 그 두 할머니는 이제 막 공원 입구를 들어서면서 이 말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공원산책은 돈 드는 일이 아니다. 입장료도 없고, 다리만 성하면 언제든 갈 수가 있는 곳이다. 또 나라에서 얼마나 신경을 써 주는지 계절마다, 시시때때로, 이 공원을 아름답게 단장해 주어서, 공원 걷기는 건강과 정서적 힐링에 최적의 장소라고 나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요양원이다. 요즈음 자식들은 저도 살기 힘든 세상이어서 부모님을 부양한다는 것은 정말 가뭄에 콩 나듯 하는 일이 될 것이고, 앞으로 그런 자식에게는 옛날의 '효자상' 내지 '효부상'을 만들어 칭찬해야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이 들면 갈 수 있는 곳이 딱 한 군데, 한 군데뿐이야!'의 정답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요즈음 SNS에 오르내리는 요양원의 비인간적인 행동에 대한 기사를 읽는다면 나는 요양원에 가기 싫다. 아니 이러한 기사를 읽기 이전부터 나와 남편의 사전에 요양원이라는 단어를 제거했다.  나와 남편은 요양원에서 매 주일(일요일) 예배드리며, 침상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말동무가 되어드린 일을 자그마치 거의 10년 정도 한 적이 있다.(코로나가 터지기 전까지 요양원을 방문했다. 그런데 코로나 시기에 그 요양병원은 코로나병원으로 전환되었고, 코로나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 요양병원(나중에는 요양원에서 요양병원으로 전환됨)이 그렇게 질이 나쁜 곳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꼼짝 못 하고 누워계시는 분, 사지를 침상에 묶어 놓은 분,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도록 목에 음식호스를 꼽아 연명치료를 몇 년간 하고 계시는 분, 약간의 치매증상으로 보자기로 싼 보따리를 들고 날마다 문 앞에 나와 자식을 기다리는 분, 옛날 젊은 시절, 잘 나가던 그 시절을 잊지 못해 우울증을 앓고 계시는 분(이 분을 보면 차라리 농사짓다가 오신 할아버지가 요양원에 더 잘 적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하루 세끼 밥상 차려주지, 아프면 즉각 보살펴주지, 그 할아버지는 요양병원 생활을 만족해하셨다. 이런 것을 보고 '세옹지마'라고나 할까?) 


요양병원이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집단생활을 함으로 외로움을 없애주고(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사항이 있다. 집단생활을 하려면 미리 둥글둥글한 성격으로 변화되든지, 아니면 그런 성격의 소유자여야만 집단생활의 즐거움을 맛볼 수가 있다. 자기 중심성이 강하거나 특별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와 너무나 다른 사람들과 한 방에서 공동생활을 한다는 것은 본인뿐만 아니라 그 방 사람 모두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앞으로 노인이 되면 점점 요양원으로 갈 확률이 높아지니 제발 아이들을 까탈스럽게 혹은 개성 있게 키우지 말고 집단생활 잘할 수 있는 성격으로 키우는 것이  오히려 노년에 본인의 행복지수를 높이는 길이다.) 또 요일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인생의 무료함을 달래주기도 하고, 먹는 문제와 건강까지 관리해 주니 이 얼마나 좋은 시설인가!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요양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이 들면 갈 수 있는 곳이 한 군데, 한 군데뿐이야!"의 또 다른 답은 무엇일까?

셋째는 병원일까? 나이 들면 신체에 끊임없이 문제가 생긴다. 아무리 관리를 잘해도 언젠가는 고장이 나게 되어 있다. 결국 인생의 마지막 길에는 병원이 떡 하니 입을 벌리고 서 있는 것이다. (물론 건강하게 살다가 죽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는 모두가 바라는 바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오는데, 다리난간에 비둘기들이 쪼르륵 앉아있다. 

"날씨가 좀 따듯해져서 비둘기들이 갈 수 있는 곳은 한 군데, 한 군데뿐이야!"라고 모여 앉아있는 비둘기들이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다리를 건너니 물오리들이 떼 지어 물가를 노닐고 있다.

사진을 찍으려니 오리들이 신기하게도 급속히 움직인다. 그래서 한 마리만 찍혔다. 

"날씨가 좀 따듯해져서 오리들이 놀 수 있는 곳은 한 군데, 한 군데뿐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한 군데, 한 군데뿐이야!"를 젊은이들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젊어서 갈 수 있는 곳은 한 군데, 한 군데뿐이야!"의 답은 무엇일까?

돈을 벌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투자회사나 부자 되는 설명회를 찾아다닐까? 아님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실천하기 위해서 유흥업소를 전전하고 있을까? 아님 앞으로 먹고살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취업하기 위해, 열심히 학원이나 도서관을 찾고 있을까? 아님 현실에 대한 분노와 원망 때문에 자신의 삶을 포기하려고 하고 있을까?


"한 군데, 한 군데뿐이야!"를 나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나는 단연코 "사람이 결국 가야 할 한 군데, 한 군데는 천국뿐이야!"라고 말하고 싶다. 이 세상 삶이 모두가 아니다. 영원한 삶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어디를 선택하는가는 자신의 결정에 달려있다.


P.S. 내가 아는 한 전도사님에게 물은 적이 있다.

"전도사님,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셨나요?"

"친구가 예수님 믿자고 전도하는데 저는 처음에는 예수님이란 존재가 있는지조차 몰랐어요. 그런데 이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만약 천국과 지옥이 분명히 존재한다면 나는 지옥에는 가기 싫어. 천국 가는 길이 예수님 믿는 것으로 된다면 내가 알지 못하는 죽음 후의 세계에 보험 드는 셈 치고 믿어봐야겠어. 그리고 교회에 들어와서 예배드리며 성경말씀 듣다 보니 믿음이 생기고, 지금 전도사님까지 되었어요!"


나는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아주 계산에 빠르고 약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나의 경우 부모님이 믿어서, 자연스럽게 믿은 경우도 물론 있다.) 즉 자기 이익에 빠른 사람이거나 아니면 지혜로운 사람이다. 죽음 이후, 미래의 일을 미리 생각하면서 대책을 간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기 이익에 빠른 성품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의 성품(사랑, 희락, 화평,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사회에 해악을 끼칠 수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더 깍쟁이 짓을 하네~"

맞는 말이다. 이들은 이익에 밝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도 한 동안 남편에게 이 말을 입에 달고 살았기 때문이다.

"당신 만나서 이익 본 것 하나도 없어!"


교회에 들어와서 변화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린다. 단번에 하나님을 만나면 단번에 변화되지만, 아닌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티각태각 하는 것을 당연히 여겨야 한다. 이익에 밝은 사람들끼리 모였으니 얼마나 이해충돌이 일어나겠는가? (그렇지 않은 교회는 참으로 감사한 교회이다. 성숙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내 속에 있는 어두움은 물러가게 된다. 즉 사람이 변화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회 시켜서 천국에 데려가기를 원하신다. 천국의 평화로운 곳에 자기중심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이 온다면 얼마나 천국의 평화가 깨어지겠는가? 그리고 좋으신 하나님은 이런 변화에 대해 상까지도 준비해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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