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드릭 몰리 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대한민국 곳곳에 수많은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백여 년 전, 지지리도 못 사는 이 땅에 선교사님들이 들어오셔서, 목숨 바쳐가며 병원과 학교를 세웠다. 그 당시는 양반과 하인, 남자와 여자, 노인과 젊은이로 구분되어, 한쪽이 한쪽을 짓누르던 사회였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말씀은 빈부의 격차도, 남녀의 차별도, 노소의 단절도 없애는 놀라운 길을 열어 놓았다.
비록 코로나 시대 이전보다는 교인 수가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많은데 "왜 사회는 더 나은 도덕적, 관계적 상태로 나아가지 않을까"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서재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이 책에서, 나는 나의 많은 의문점을 해결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좀 더 분명하게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고, 내가 이해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 책을 요약해 보기로 했다.(좀 더 정확하게 읽어보기를 원하시는 분은 이 책을 직접 읽어보시기를 강력히 권합니다.)
-현대인의 삶
현시대 사람, 모두가 삶의 수준이 향상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사람들의 '삶의 수준이 향상된다'는 의미는 물질적인 수준이 향상되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의 이 말에 나는 동의한다. 예전에 있던 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의 대부분의 꿈은 '돈 많은 백수'였다. 못 사는 아이들이 아니라 잘 사는 지역의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욕망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다. '왜 돈을 많이 벌기 원하니?'에 대한 답은 좋은 집, 차, 안정된 생활을 위해서라고 답했다. 많은 아이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는데, 거의 예외적인 다른 답이 없었다. 오직 육신의 안락함을 위해 돈을 벌겠다고 했다.)
-현대인의 욕망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이런 꿈의 형성에는 소비주의 경제이론과 미디어의 영향력이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1) '소비주의'란 '점점 더 증가하는 상품소비가 유익하다'라는 경제 이론이다. 물건을 만들거나 파는 경영자들은 소비 심리를 유발하도록 하는 프로그램화 연구에 성공했다. 예를 들자면 폰의 경우, 새 상품이 나올 때마다 그 새 상품을 가지지 않을 경우, 그 사람들은 뭔가 시대에 뒤떨어진 자가 된다는 인식을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2) 모든 미디어는 '인간 자신이 도덕적 가치를 수립하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그들 자신이 운명의 주인공'이라는 세속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세속적 가치관에서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어서, 어떤 영원한 준거점을 가지지 않는다는데에 문제점이 있다. 모든 것은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는 것'이다. 미디어의 이런 풍조는 사람들의 생활방식에도 영향력을 미쳐 미디어가 조장하는 생활방식이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의 삶으로 보이고, 사람들은 이를 뒤쫓아가는 허겁지겁한 삶의 형태를 이루게 된다.
-현대인의 삶의 결론
사람들은 미디어의 광고를 통한 경영자가 조장하는 삶의 수준으로 자신의 삶을 맞추다 보니, 빚은 점점 증가하게 되고, 자신보다 더 멋진 삶을 사는 조장된 사람의 이미지를 보면, 자신은 실패자가 아닌가 하여 불안해한다. 이미지화된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 돈벌이에 집중하다 보니, 인간관계는 깨어지고, 이로 인해 점점 더 외톨이가 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럼 현시대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떠한가?
"성찰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소크라테스(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인용함.)의 말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성찰하지 않는다면, 시대의 흐름 속에 똑같이 떠내려가면서도 자신은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1) 세계관 살펴보기
세상에는 두 개의 세계관이 있다.
(1) 세속적 세계관: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고, 자신이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며, 스스로 자신의 업적과 지식의 경계를 정하고, 자기 스스로의 판단으로 택한 것들 외에는 다른 도덕적 기준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2) 기독교적 세계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 절대적인 도덕적 기준을 세우셨고, 이를 따라 살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현시대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절대적인 도덕기준이 자신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지에 따라, 스스로 가치들을 선택하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며, 스스로 자신이 탄 배의 선장 노릇을 하려고 한다.
지금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성찰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도 소비주의와 물질주의의 압도적인 흐름에 무릎 꿇고 복종하는 삶을 살게 된다. 특히 세속주의자들은 우리의 문화에 그리스도인보다 훨씬 더 유능하게 영향력을 미쳐, 문화를 그들의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우리 중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나 실천적 측면에서는 세속적이다. 세상은 '온갖 종류의 사람, 온갖 종류의 생활방식, 그리고 모든 이념에 열린 개방성을 가진 자를 미덕으로 생각하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께 돌아와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기 때문에 아무것에나 열려있는 자가 될 수가 없다.
2) 나 자신 살펴보기
우리에게는 두 명의 '나'가 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나'로 다른 사람에게 알려진 나의 모습이다. 이 '나'는 또래 집단의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어떻게 행동하고 말해야 하는지를 경험을 통해 직관적으로 안다.
다른 하나는 실제의 나인데 이는 '하나님께 알려진 나'이다. 우리의 말과 행위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자신'의 결과물인데, 자신의 이미지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는 농담하고 속이면서, 눈에 보이는 우리가 실제의 우리라고 스스로를 속이면서 살고 있다. 하나님께 알려진 나를 아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알려진 나'를 알아갈 수 있다.
-문화적 기독교인
기독교인이 가지고 있는 빈곤한 가치를 살펴보면 문화적 기독교인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게 된다.
1) 개인적 평안: 다른 사람이, 세계가 어떻든 그들의 문제로 인해 괴로움을 겪지 않겠다는 것, 개인적으로 괴로움을 당할 가능성을 최소화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겠다는 것. 나의 생애와 자녀의 생애동안, 다른 어떤 결과에도 상관없이 나의 개인적 삶의 패턴이 어지럽혀지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가치관을 가진다.
2) 풍요: 물질, 물질 그리고 더 많은 물질로 이루어지는 삶을 추구한다.
3) 탈기독교 문화(문화적 기독교): 기독교는 번성하고 있으나 우리의 문화는 더 이상 기독교적 가치들에 의해 인도를 받지 못하는 탈 기독교 문화이다. 이 문화에 사로잡혀 있다.
문화적 기독교인은 본래의 하나님 대신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 자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경에 밑줄을 그은 그 하나님을 원하며, 절대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상대적인 하나님을 원한다. 문화적 기독교인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로 우리에게 개인적인 평안과 풍요를 제공해 주실 것을 요구한다. 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지, 거룩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적응하기보다, 하나님이 우리의 변덕에 적응하시기를 원한다.
나는 과연 성경적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문화적 그리스도인인지를 성찰(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할 필요가 있다.
P.S. 이 책을 계속 살펴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