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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11(고통에 대해)

(패드릭 몰리 저) 고통에 대하여

by 김해경

"하나님은 위대한 사람을 위대한 시련을 통해 위대한 일을 하도록 준비시키신다."(J.F. 케네디)


1. 고통

세상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행복해지는 것, 고통과 고난을 피하는 것, 그리고 그토록 많은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황량한 삶을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멋진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어째서 안 그런가? 어느 바보가 고통스러운 삶을 추구하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풍성하게 복을 주시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성경은 고통이 하나님의 질서의 일부임을 가르친다. 우리는 고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고통이 우리를 찾아올 때 놀라서도 안 된다. 모두가 살면서 고통을 겪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결정은 그 고난을 그리스도와 함께 겪을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 없이 겪을 것이냐? 하는 것뿐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도 자기 위에 십자가를 지우거나 시련을 택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약 십자가나 시련이 닥쳐온다면, 그것을 인내하고 감당하며, 그것이 자기에게 선하고 유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은 나를 돌보시는가?'

'하나님은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계실까?'

'하나님은 나를 돕고자 하시는가?'

'나를 향한 그분의 뜻은 무엇인가?' 등 우리 마음속에는 수많은 의문과 회의가 떠돌아 다닌다.

분명한 진리는 삶이 우리 뜻대로 될 때, 우리는 모든 영광을 우리 자신에게 돌린다. 그러나 고통은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집중시킨다.


고통은 왜 일어날까? 하나님이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아니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고통이 일어나는 것일까?


고통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게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6~7)"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당할 때, 그래서 아버지 앞에 나아갈 때, 같이 눈물을 흘리시며, 함께 아파하시면서 우리를 치료하신다.


2.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일곱 가지 이유

1) 무고한 실수: 예를 들자면 야구를 하다가 야구공이 하수구에 빠져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 공은 아주 값진 공이다. 우리는 울며, 고통을 당한다. 무고한 실수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그 결과를 감내해야 한다.

2) 잘못된 판단: 남의 집 유리창과 가까운 곳에서 야구를 하다가, 그만 유리창을 깨뜨렸다. 유리창과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야구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 하는 잘못된 판단으로 야구를 하다가 사고를 낸 것이다. 잘못된 판단에는 일련의 지침이 있다. 그런 점에서 무고한 실수와는 다르다. 무고한 실수에는 그 어떤 지침도 존재하지 않으나, 잘못된 판단에는 몇 가지 형태의 지침이 있고, 그것을 따르기만 한다면, 고통을 막아줄 수 있다.

3) 신실함의 문제: 야구방망이를 훔치다가 들켰다. 그래서 매를 맞아 운다. 거짓말, 부정직등으로 죄를 지은 경우이고, 거기에 합당한 벌을 받으며, 고통을 당한다.

4) 환경의 문제: 야구경기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경찰이 다가와, 이제 거리에서는 야구를 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사소한 예시이다. 그러나 갑자기 사랑하는 자녀가 교통사고를 당했거나, 본인이 해고를 당하는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로 인해 고통을 당한다.

5) 악의 발생: 우리가 아무리 사정이 그렇지 않기를 바랄찌라도 세상에는 악이 존재한다. 세상은 완벽하지 않다. 갑자기 지나가던 깡패가 아무 이유 없이 딸의 얼굴을 후려쳐서 큰 상처가 남게 되었다. 우리는 고통한다.

6) 하나님의 징계: 하나님은 모든 일을 아시고, 우리를 좀 더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으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고통을 사용해 우리의 성품을 형성하신다.

"하나님은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7~8)"

7) 하나님의 시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이었다.

"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성품이 순전한지 알아보기 위해 우리를 시험하신다. 욥의 경우에는 사업이 망하고, 자식들이 죽고, 건강마저 빼앗기는 엄청난 고통을 치렀지만, 그 모든 상황 속에서도 죄를 짓지 않았고,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렸다.


우리는 무고한 실수로, 잘못된 판단으로, 우리의 죄의 결과로, 또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로, 하나님의 징계와 시험으로 고통을 당한다. 어느 경우이든 우리는 고통을 피하지 못한다. 고통은 먹는 것만큼이나 우리 삶의 일부이다. 그 고통에 우리는 저항하며 맞설 수도 있고, 받아들이고 이를 인내하며 극복할 수도 있다.


3. 고통에 맞섬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낮추기에 앞서 종종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저항하거나 반역한다. 오히려 고통을 피하거나 그것에 맞서는 것은, 우리가 고통을 통해 귀중한 진리를 배우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이 된다.


앤 모로우 린드버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고통자체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준다고 믿지 않는다. 만약 고통만이 가르친다면, 온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현명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고통에 슬픔, 이해, 인내, 사랑, 개방성, 그리고 기꺼이 깨어진 상태로 남아있고자 하는 태도 등이 덧붙여져야 한다. 상황이 정상적이라면, 이 모든 것과 다른 요소들이 결합해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칠 수 있고, 우리를 새롭게 거듭난 길로 인도할 수 있다."


고통을 피하고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행동한다.

1) 호소하기 : 첫 번째 반응 중 하나는 하나님께 그분의 공정함에 대해 호소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가 바라는 것과 다르게 대하시는 것이 옳은가?' 에 대해 호소한다. 그러나 그분의 약속은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 34:19)"이다.

2) 비교하기 : 우리 자신을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며, 따라서 긍휼을 받을만하다고 주장한다. 혹은 우리 자신을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서 우리가 그들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시편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시 49:16~17)"

3) 불퉁거리기 : 우리는 상황에 낙심하고 자기 연민에 빠진다. 우리가 겪어야 되는 고통에 대해 불퉁거리고, 자신에 대해 유감스럽게 여긴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시편37: 7~8)"

4) 소리 지르기 :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으로 인해 화가 나 주먹을 휘두르고, 하나님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이런 일은 무익하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

5) 의심하기 : 우리는 하나님이 실재하시는지를 의심하고, 두려워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4. 고통의 해결방향

우리는 고통을 겪을 때마다 이 모든 단계를 밟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통을 겪을 때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고통에 대한 해결책은 우리가 어쩌다 이런 일을 당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비틀거리지 않고 살아가며, 근심하지 않으며, 인내하고 견디면서, 성령의 능력을 따라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참여라는 교제를 즐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바라는 대로 구원해 주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자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보다 큰 계획을 갖고 계신다. 또한 그분은 우리를 신속하게 구원해 주지 않으실 때도 많다. 우리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우리의 모든 근심을 그분에게 맡기는 것이 우리가 할 역할이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시편 40:11)"


5. 고통의 특권

고통에 대한 사도바울의 반응은

"그러므로 도리어 내가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가지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

분명하게 바울은 고통을 기뻐했다. 그러나 고통 자체를 위해 고통을 기뻐한 것은 아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나누는 교제의 기쁨 때문에 고통을 기뻐한 것이다.


선을 행하기 위한 고통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일부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권면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


고통이 한순간이 아니라 몇 주, 혹은 몇 달, 심지어 몇 년씩, 끝없이 그런 상황이 펼쳐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완전히 하나님을 신뢰할 때, 그 은혜의 문턱을 넘어설 때, 근심을 극복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얻게 된다. 우리가 겪어보지 않은 어떤 불확실성을 무기 삼아, 우리를 위협하고자 해도, 우리는 주님에 대한 믿음의 응답으로, 그분의 손길이 우리를 감싸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 예를 야곱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형 에서를 속인 야곱은 목숨의 위험 때문에 브엘세바에서 외삼촌이 있는 하란까지 도망을 간다.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의 거리는 서울에서 부산까지를 왕복하는 거리이다. 그 옛날 무슨 교통수단이 있었겠는가? 오로지 걸어갈 뿐이다. 낯선 길에 대한 두려움과 사나운 짐승에 대한 두려움, 또 도적을 만날 수 있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야곱은 한 곳에 이르러 노숙하려는 날 밤,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아마 떠나기 전, 엄마 리브가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길을 가라고 했음에 분명하다. 그러니 기도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 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믿음이 생긴 야곱은 길 갈 동안의 노자돈인 기름을 그대로 그 자리에 붓는 믿음의 행위를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믿음의 반응을 한다.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창 28:18)"

이처럼 믿음에는 역사하는 힘이 있다.


삶에서 고통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고통을 담대하게 맞이하는 것이다. 삶이 아무리 어려워질지라도,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이 보여도, 절대 끝난 것이 아니다. 언제라도 다른 길이 있다. 하나님은 언제라도 자신의 백성을 회복시켜 주신다. 그것이 욥이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서 신실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욥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벧전 5:10)"


삶에는 고통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주 예수의 고난에 대한 독특한 참여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고통을 당할 때, 맞서거나 피하려 하지만, 결국은 고통을 당하게 된다. 오히려 담대히 고통을 맞이하여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은혜를 맛보는 것이 훨씬 더 값지고 멋진 인생이 된다.


때로는 고통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고, 그리스도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준비를 해야 한다. 또한 더욱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자신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 예수님을 만나고, 오히려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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