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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16(은밀한 생각)

(패트릭 몰리 저) 은밀한 생각에 대하여

by 김해경

"사람의 은밀한 생각은 모든 것을 향한다. 거룩한 것, 세속적인 것, 깨끗한 것, 음란한 것, 무거운 것, 그리고 가벼운 것, 모두를 수치심이나 부끄러움 없이 생각한다." -토마스 홉스


지금 당신은 다른 이들이 알고 있는 당신과 다르게 보일 만한 은밀한 생각을 하며 살고 있지 않는가? 당신의 친구와 동료들이 당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본다면 당황하지 않겠는가? 만약 사람들이 당신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면, 당신의 배우자가 당신에게 이혼을 요구하지 않겠는가?


우리 모두는 은밀한 생각, 즉 우리 자신만 아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은밀한 삶은 대개 가시적인 당신, 즉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당신과 크게 다르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당신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 당신이다.


우리 중 어떤 사람에게는 그 은밀한 생각이, 우리를 세계적인 유명한 부자로, 혹은 자기를 유혹하는 아름다운 여인과의 만남이라는 꿈의 세계로, 어떤 이에게는 자신이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 삶에 대한 비통함과 분노로 가득 찬 증오의 세계로 나타난다.


우리의 은밀한 생각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주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동안 그 주제에 대해 말하는 것을 사람들은 꺼려왔다. 어째서 사람들은 은밀한 생각을 하는 것일까? 도대체 우리의 마음속 구석진 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마음의 전쟁

교통이 혼잡해 차가 밀린다. 신호등을 보고 속도를 늦추면서, 다음번 녹색 신호에서는 교차로를 통과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기며 안도한다.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는 동안, 내 곁에 있던 차가 내 앞의 그 비좁은 공간을 보더니, 경고도 없이 차선을 바꾸며 끼어든다.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백미러를 통해 내 차 뒤의 상황을 체크한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지금 교회에 가는 길이기 때문에, 마음을 재빨리 다잡고 평정심을 유지하려 노력한다.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고, 길게 늘어서 있던 차들이 조금씩 교차로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느 차가 교차로를 마지막으로 빠져나갔을지를 추측해 보라. 그렇다. 바로 그 차이다. 그 차 뒤에 있던 나는 붉은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서야 했다. 그것이 우리를 분개하게 만든다. 교회예배고 뭐고, 순간적으로 우리 마음속의, 하나님께 순복 하지 않는 나의 일부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를, 우리는 그냥 내지르고 만다.


만약 이것이 단 한 번의 사건이라면, 우리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매일,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통제하는 문제와 씨름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진짜 전쟁터는 우리의 마음이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라.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비한 사람이도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5~24)"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 중 한 사람인 사도바울의 고백에서, 바울도 우리와 같은 갈등을 했음을 아는 것은, 그나마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MIT 교수인 더글라스 맥그레거는 "X이론, Y이론"을 경영학에서 발전시켰다. X이론을 지닌 매니저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게으르고 부책임하며, 지속적으로 감독을 받지 않으면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Y이론을 지닌 매니저는, 사람들은 대개 일을 잘하기를 바라고 있으며, 분명하게 정의된 목표를 제시하면, 그것에 잘 대응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지원과 격려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이 이론을 우리의 마음에 비유한다면 "X마음"은 육, 혹은 악한 본성에 지배되는 마음이고, "Y마음"은 성령에 의해 지배되는 마음을 말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X마음의 악한 본성을 따라 행하도록 방치되어 있지는 않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에게 Y마음을 가르치고, 그 마음을 따라 행하도록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위한 싸움에서 이길 수 있도록, 우리를 준비시키신다.


만약 우리가 그 두 가지 마음의 작동법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은밀한 생각을 제어할 수 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X마음)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Y마음)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이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우리에게는 두 가지 구별된 본성-악한 영향력에 반응하는 악한 본성과 하나님의 성령에 반응하는 새로운 피조물의 본성-을 갖고 있다. 은밀한 생각이라는 죄는 X마음 안에서, 즉 우리의 악한 본성 안에서 잉태된다.


우리 모두에게는 X마음과 Y마음이 있다. 우리는 악한 본성을 따라 살면서 X마음의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성령님을 따라 살면서 Y마음의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너무나 자주, 우리는 이쪽저쪽을 오간다. 우리 인간이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불안정한 두 마음을 지닌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유혹과 죄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길을 좀더 안전하게 걸을 수 있도록 해 준다. 차이점을 이해하는 빛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오는데, 그 말씀을 잘 이해할수록, 그 빛의 밝기는 밝아진다. 빛이 밝을수록, 물체의 흐릿함이 덜해지고, 우리는 어디로 걸어야 하는지에 대해 더 큰 확신을 얻게 된다.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생각들은 죄가 아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회심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부정적인 생각들로 인해 유혹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유혹자(사탄)가 가장 잘하는 일이, 우리의 믿음과 관련해 우리를 낙담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종 우리는 이렇게 묻는다 "여전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어떻게 참된 그리스도인일 수 있는가?" 만약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일단 승리의 깃발을 꽂을 준비는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은 우리를 성령님께 간구하는 길로 이끄는데, 이런 생각조차 없는 경우, 무감각해져 있는 상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유혹이 반복되는 것을 어쩌지 못해, 자신을 정신적으로 학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은 죄가 아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쓰레기들을 너무 많이 집어넣어서, 그것이 우리를 유혹하게 만든 것이다. 그럴지라도 생각은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X마음이 제멋대로 활개 치며 선을 넘도록 해서는 안 된다.


유혹이 선을 넘을 때

우리의 생각 속에서 유혹은 언제 실제적인 죄가 될까? 가장 적절한 예는 섹스이다. 남자들은 육체적으로 여자들에게 끌린다. 그렇다면 언제 정신적 끌림이 죄가 되는가? 단순한 유혹에서 실제적인 죄로 넘어가는 어떤 명확한 선이 존재하는가? 우리는 우리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그을 수 있는가?


우리의 정상적인 관찰이 비정상적인 집착이 될 때, 우리는 선을 넘는다. R. C. 스프로울박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자에 대해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은 욕망이 아니다. 욕망은 우리가 단순한 인식을 집착 어린 판타지로 바꿀 때 태어난다. 우리가 성적인 생각을 우리 마음속으로 끌어들여 품을 때, 우리는 단순한 인식에서 욕망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루터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우리는 새가 우리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그러나 새를 끌어들여 우리 머리에 둥지를 틀게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유혹은 아름다운 여인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것이다. 죄는 그녀를 다시 보기 위해 그녀가 사는 곳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이다."


어떤 일을 잘하고 나면 우리는 으쓱한다. 그때 인간으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꽤 좋은 느낌을 갖는다. 우리가 이룬 일에 관해 좋은 느낌을 갖는 것이 죄가 되는가? 아니다. 자신이 이룬 일을 다른 이들이 이룬 일과 비교하고,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우월한 자리에 올려놓을 때, 우리는 선을 넘는 셈이 된다.("어떻게 살 것인가?14 교만에 대해" 참조)


드와이트 무디는 이런 말을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유혹에 노출되어 있음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붙들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또한 유혹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유혹을 받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유혹에 빠지는 것은 죄다."


하나님께는 그 어떤 비밀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입 밖에 내기도 전에,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알고 계신다. 다른 누구도 모르지만,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 우리의 은밀한 생각의 목표는 성결한 삶을 사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선을 넘어 죄에 빠졌을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죄를 고백하라. 당신은 죄를 지은 이에게 사과하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상황을 바로잡고, 그리스도의 용서를 받으며, 앞으로 나아가라.

'자기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우리말과 행위의 가시성은 우리가 우리 행동에 대해 조심하도록 돕는다. 가시성은 어느 정도의 자기 훈련을 초래한다. 때때로 우리는 동료집단의 압력이,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우리가 의로운 삶을 살게 하는데 실제적으로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우리 모두는 다른 이들과 잘 지내고, 좋은 평판을 받기 원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우리의 행동을 제어한다. 가시성에 의한 동료의 압력은 나쁜 게 아니다. 만약 그 어떤 동료의 압력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책임도 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죄에 대한 유혹은 더욱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도, 우리는 많은 은밀한 생각들을 감추며 살아왔다. 그러나 일단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면, 우리는 이런 은밀한 생각들을 더 잘 감춘다. 우리는 신자로서 새로운 직무 내용 설명서에 맞춰, 우리의 말과 행위를 조심스럽게 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시성이 낮은 죄는 사각지대와 같다. 그렇게 잘 인식되지 않는 분야야말로,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기 위한 가장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곳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시편 19:12~13)"


다음의 표를 보자.

1) 높은 가시성과 높은 인식 :가장 노골적인 죄로, 누구라도 잘못된 것으로 인식할 만한 죄이다.

2) 높은 가시성과 낮은 인식 :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화를 잘 낸다. 그렇게 가끔씩 화를 내는 것이 본인에게는 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화를 내는 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는지를, 그가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3) 낮은 가시성과 높은 인식 : 그리스도인에게는 천벌과 같은 존재이다. 우리의 은밀한 생각 안에 들어있는 죄를 우리는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낮은 가시성으로 인해, 어느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다. 오직 성령에 의한 강력한 능력을 통해 정결한 삶으로 회복될 수 있다.

4) 낮은 가시성과 낮은 인식 : 모든 죄 중 가장 교활한 죄이다. 다른 누구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 자신들도 역시 그 죄를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점검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잘못된 생각으로 인한 죄에 대해 무감각해져 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은밀한 생각을 보다 잘 인식하려고 한다면,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것처럼 보이지 않을 때, (말씀에 비추어 낯설 때) 잠시 멈춰 서서 때때로 "왜?"라고 묻는다면, 그때 우리는 자신의 은밀한 생각을 정복하기 위한 거대한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고, 바보로 만드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스스로의 이미지를 너무 중요하게 여긴 나머지, 종종 우리는 우리가 영웅으로 끝나기만 한다면, 실패에 대한 그 어떤 이유라도 믿으려 한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그것을 지적하며 이렇게 말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우리의 생각, 동기, 그리고 야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견고한 이해를 발전시키지 않는 한, 우리는 순전하지 못한 생각, 잘못된 동기, 그리고 이기적인 야심을 갖게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망루에 보초를 세우지 않는다면, '낮은 인식'이라는 외투를 입고, 우리의 생각 속으로 죄는 침투해 들어올 것이다. 이를 이해한 솔로몬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6:2)"


높은 가시성은 우리가 그 죄를 크게 보고, 높은 인식은 변화를 추구하도록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한다. 그러나 낮은 가시성과 낮은 인식은 그 죄를 우리로 하여금 간과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찰하는 삶을 살아가지 않는 한, 변화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은밀한 생각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다윗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시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우리의 은밀한 생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우리를 살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개방해야 한다. 성령님을 의지하며, 성령님께 우리의 정신(우리의 X마음)을 살피시고, 우리의 오류를 지적해 주시라고, 요청해야만 한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힘든 일이다. 그 이유는, 아이들은 늘 우리의 규칙과 질서의 한계를 시험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어떤 경계를 정해놓든, 아이들은 늘 우리의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고, 또 시험한다.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늘 하나님이 세우신 그 한계를 시험하고 또 시험한다. 우리가 Y마음을 유지하고, X마음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생각에 대한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바울은 이렇게 답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5)"

그 어떤 생각도 제멋대로 흘러가게 허용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생각은 늘 부모를 시험하고자 하는 딸처럼, 자기 멋대로 하고 싶어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한다. 왜일까? 솔로몬의 전도서의 마무리하는 말이 그 대답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전 12:14)"실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할 충분한 의지력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하신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을 주관하실 때, 성령께서 능력을 발휘하신다. 우리가 옛사람-악한 본성, 육-이 우리를 주관하게 할 때, 성령의 불은 꺼진다. 해결책은 우리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는 것이다. 즉 생각들을 말씀에 비추어 점검해 보고, 아닌 것은 이를 제거해 주시기를 성령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죄를 지었음을 알게 될 경우, 그 죄에 대해 고백하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우리를 주관하시기를 간청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이 성령의 능력을 따라 사는 삶이며, 우리의 은밀한 생각들을 사로잡아, 하나님의 생각에 복종시키는 삶이다. 이런 훈련과 노력을 할 때, 우리의 생각은 점점 더 정결해질 것이고, 우리의 생각이 변함에 따라, 우리의 삶도 점점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전진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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