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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에 대하여 1(신앙의 전제 올바로 세우기)

김민호 저 "기독교 세계관"

by 김해경

대형교회 수준의 어느 목사님을 만났다. 앞으로의 세대 양육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교회인데, 그 교회의 고민은 젊은이들의 삶이 쉽게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그 교회의 젊은이들만의 문제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교회의 고민이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침 그 자리에 모인 목회자분들의 의견 교환 후의 결론은 세계관, 즉 가치관의 변화가 있어야만 사람이 바뀐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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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세계관은 어떤 것일까'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찾아보다가, 김민호 저 "기독교 세계관"이란 책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 이 책을 요약하면서, 나의 사고방식 즉 세계관을 점검해보고자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세계관은 세상을 보는 전제인데, 이 전제가 바뀌어야 삶이 달라진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을 설득하기 전에, 먼저 이 사람이 어떤 전제를 가지고 세상을 보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그러므로 전도는 그들의 잘못 쓴 선글라스를 벗기고 믿음의 사람이 보는 아름다운 세계를 그들로 하여금 보게 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믿음의 사람의 역할은 아름다운 색깔들, 왜곡되지 않은 것들을 그들이 볼 수 있도록, 그들이 참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한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에 뛰어든 이유는 자신의 영혼 문제에 있어서 도무지 해석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문제는 '칭의'라는 용어에 있었다. 여러 가지 고행도 해봤고 오랜 수도원 생활도 했지만, '칭의'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로마서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라는 구절을 깨닫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자 자기가 바라본 로마 가톨릭에 대한 이해가 다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애초에 로마 가톨릭의 모든 잘못을 낱낱이 따지면서 개혁할 의지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칭의'란 용어에 대한 개념이 바뀌자, 가톨릭에 대한 이해 전체가 달라지게 된 것이다. 하나의 단어에 대한 이해의 변화가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앙의 전제들을 올바로 세우기

사랑의 전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너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그런데 여기서 이웃 사랑을 전제로 하여 하나님 사랑을 생각하면 인본주의가 된다. 하나님 사랑이 먼저 오고 이웃 사랑을 생각하면 신본주의가 된다.


그 예가 코로나 19로 인한 비대면 예배이다. 전제가 바뀐 케이스이다. 이웃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비대면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이웃 사랑이 전제가 됐기 때문에 사람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경우이다. 사람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 말씀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어찌 되었든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셔야 하는 우상으로 하나님이 둔갑하게 된다.


동성애문제도 "그 사람들은 불쌍한 영혼이니 사랑하고 포용해 주자"는 말에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포용해 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하나님 사랑'을 기준으로 결정해야 한다. '하나님 사랑'을 기준으로 하면 동성애라는 죄는 미워하고, 그러나 동성애자들을 돕게 된다. 결코 우리의 감정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사랑의 전제가 분명하게 바뀌지 않으면 이 싸움에서 항상 후퇴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믿음의 사람을 '사랑 없는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요즈음 모든 교회가 영혼구원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이라도 더 예배당에 오도록 하는 게 사랑일가? 아니면 교회의 거룩을 우선하고, 영혼구원을 뒤따르게 하는 게 사랑일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야야 한다. 현대 교회는 예배가 모욕을 당하고 불경건한 예배자가 있더라도 참아가면서 어떡하든지 더 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게 하려고 노력했다. 이웃사랑, 영혼사랑을 항상 우선순위에 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예배의 경건함은 무너지고 하나님에 대한 영광도 무너졌다. 교인의 숫자는 늘었지만, 교인은 더 부패하고 더 타락했다. 옛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올바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적게 모이더라도 경건과 거룩을 우선했다. 실제로 이것이 우선이 되면 교회에 대한 불신자들의 평가가 달라진다. "예수 믿는 사람은 정직하네요" "예수 믿는 사람은 좀 다르네요"라는 말을 하게 되고, 믿음의 사람들의 선한 행실 때문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가 있게 된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영혼구원이 아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 11:45)"이다. 거룩이 우선이고, 영혼구원은 그다음이다. 우리는 멋대로 그 순서를 바꾸었다. 결국 신앙의 전제를 바꾼 것이다. 이렇게 전제가 잘못되면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된다.


예배는 사도신경이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은 이런 사람이 예배해야 한다는 전제를 제시하는 시금석이다.


"창조론인가? 진화론인가?"도 전제의 문제이다. 진화론은 모든 동식물이 미생물에서 출발했다는 유물론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 이 전제를 따르게 되면, 사람은 굳이 윤리적일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왜냐하면 미생물에서 진화된 존재에게 윤리적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윤리를 물을 수 있는 근거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전제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전제를 빼앗기면 모든 것을 빼앗긴다. 뿌리를 빼앗겼는데 어찌 가지와 열매를 챙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기본적인 전제를 분명히 세워야 한다. 전제가 분명하지 않으면 사고 활동이 올바르지 않다. 그렇게 되면 전제가 분명한 사람에게 끌려 다니게 된다. (그래서 오늘날 거짓과 선동이 난무하고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전제, 곧 세계관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신앙이 개종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항상 "예수 믿기 이전과 이후의 나의 전제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이어(James W. Sire)의 세계관을 명제로 표현한다면, 다음의 다섯 가지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을 믿음의 사람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첫째, 참된 최고의 실재는 무엇인가?

정신이면 관념론, 돈이나 육체면 유물론, 하나님이 참된 실재이면 유신론이 된다.


둘째, 인간의 존재는 무엇인가?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만이 창조주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셋째,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인간이 죽으면 영혼이 소멸된다는 주장, 즉 지옥 같은 건 없고 영혼은 그냥 없어진다는 전제가 있다. 이들은 어차피 한 번뿐인 인생, 즐기면서 하고 싶은 대로 살아보자라는 사고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또 지옥과 천국이 있음을 알기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내세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우리 신앙의 중요한 전제 중 하나가 된다.


넷째.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도덕적 기초는 무엇인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람의 뜻을 기준으로 판단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판단하는가는 아주 중요한 전제이다. 도덕적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는 정말 중요하다. 이 기초가 불분명하면 행동이 이상해진다.


다섯째, 인간 역사의 의미는 무엇인가?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져 가는 것으로 역사를 본다.


이 다섯 가지 질문에 올바른 답을 내려 우리의 신앙의 전제를 바로 잡을 때, 세계관이 올바르게 형성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흔들림 없이 말씀을 근거로 한 믿음 위에 굳게 세워지게 된다.


P.S. 당분간 기독교적 세계관을 살펴 보고자 합니다.

33.jpg 철원 한탄강 주상절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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