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저 "기독교 세계관"
차이점 1 철학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나를 스스로 구원할까? 어떻게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고 고달픈 문제들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를 계속 고민하며 지혜를 짜내면서, 나름 진리에 접근하려고 고민한다. 그들은 구원의 주체를 사람 자신으로 상정해서 "어떻게 내가 나를 구원할 것인가?", 이 질문만을 계속 던지는 사람들이다. 철학은 "내가 나를 스스로 구원해야 한다"라는 이 전제를 결단코 포기하지 못한다. 모든 철학에는 중보론이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중보론에서 철학과 완전히 다른 분기점을 형성한다. 믿음의 사람에게 구원의 주체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뿐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믿음의 사람을 구원하신다.
차이점 2 기독교는 자유를, 철학은 자율을 추구한다. 자유와 방종은 다른데, 자유는 법률적으로 정해진 범위(경계) 안에서의 자유로움을 말한다. 이는 운전자가 도로교통법의 범주 안에서 경찰이나 다른 어떤 사람들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운전을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나 기독교에서의 자유는 이보다 더 강력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자유는 법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 법을 억지로 지킨다면 그 법은 억압이 되지만, 법을 사랑해서 적극적으로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법이 자유가 된다. 예를 들어 공부를 너무 싫어하는 학생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 학생에게 공부에 대한 요구는 억압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 학생이 공부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점점 공부를 사랑하게 된다고 하자. 이 학생에게 공부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오히려 억압으로 여겨지게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명령한다. 율법의 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즉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율법 지키는 것을 억압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없이 '자기 사랑'이라는 이기심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런 존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억압으로 여겨질 뿐이다.
그런데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율법이 억압이 아니라 즐거움이 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의무가 아니라 자유로운 행동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고 하신 말씀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방종의 허락이 아니라, 율법을 싫어하던 심령에서 율법을 즐거워하는 심령으로 변화시켜 주시겠다는 자유의 선언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자율은 한자 自律 에서 볼 수 있듯이 "내가 스스로 법이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은 자기 스스로 법이 되어 자기 방식대로 사는 원리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사고방식이다. 이것이 오히려 방종에 근접하는 원리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기며, 자율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자신이 법이 되는 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자유로운 삶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그러므로 철학자들은 수천 년 동안 이런 생각의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계속적으로 다양한 이론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철학이 지금도 계속 새로운 이론을 내놓는다는 것은, 스스로 오류 가운데 여전히 길을 찾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건전한 기독교 신학자들도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지만 결국은 성경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신학은 진리를 명확하게 하는데 초점이 있지, 새로운 진리를 제시하는 데 있지 않다.
철학은 오류를 극복하기 위해 사람 중심의 관점에서 여러 견해를 산발적으로 제시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만을 유일한 해답으로 제시한다. 성경은 완성된 하나님의 계시로서 모든 오류의 해답이다. 이것이 기독교, 즉 신학과 철학의 근본적인 차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