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기독교 세계관"
1. 기독교 세계관의 출발점: 하나님 사랑
기독교 세계관은 언제나 하나님 사랑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은 하나님 사랑을 기초로 할 때에 가능하다. 인간적인 사랑은 꼭 서로에게 아픔과 상처를 남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 그 사랑은 물 흐르듯이 흘러가기 때문에 생색도, 보상심리도 없다. 공짜로, 은혜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특히 현시대에서 자녀사랑은 유별나다. 물론 우리는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그 사랑의 방법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사랑과 양육이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은 인간 중심의 세계관과 계속 충돌을 일으킨다.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의 사랑과 하나님 중심의 관점에서의 사랑은 결단코 일치할 수 없다. 같은 사랑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하나님 사랑을 전제로 한 것인가?' 혹은 "사람 사랑을 전제로 한 것인가?'에 따라 해석과 결과는 천양지차이다.
예를 들어 성경은 혼전 성관계를 분명하게 금하고 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 중심의 관점에서는 결혼까지 인내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4:4)"
반면 사람 중심의 관점에서는 육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인들에게 혼전순결을 이야기하면 고리타분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쪽이 좋은 결과를 냈는지는 이미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 사랑에서 출발하는 이런 기독교 세계관은 무엇일까?
2. 기독교 세계관
(1) 기독교 세계관은 이원론을 극복한다.
플라톤은 모든 것을 다 이분법적으로 봤다. 즉 흑과 백을 분명하게 나눈다. 반면 기독교는 이원론적이지 않고 오히려 일원론적이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지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세상에 빛이니까 산속에 들어가 살아라" 혹은 "너희들은 거룩하니까 까마귀 하고 놀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제자들에게 "세상 속의 소금(마 5:13)"이며 "세상 속의 빛(마 5:14)"이라고 말씀하셨다.
동양의 불교는 이원론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종교이다. 그래서 세상을 등지고 자기 책임을 외면한 채 산에 들어가 산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상 속에 철저히 파고 들어서 우리의 책임을 다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 어둠을 밝히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세계관이다.
기독교는 이원론을 극복한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도 여기서 비롯된다. 로마 가톨릭은 불교와 마찬가지로 "성"과 "속"을 나눈다. 종교적인 영역은 거룩하고, 종교적인 영역 밖은 부정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개신교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부정한 사람을 멀리 하거나 피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부정한 사람을 만져서 거룩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라고 가르치셨지만, 또한 세상에서 책임 있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셨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기 때문에 세상으로 담대하게 나아가 어둠을 물리쳐야 한다. 부정해진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경작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 세계관은 플라톤의 이원론과 완전히 다르다.
(2) 이신론을 극복한다.
이신론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나 피조계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으시고 구경만 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한자로 이신, 이치 理에 신 神이다. 곧 이치(이성적 합리성)가 신이 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신적 권위를 부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자기 능력이나 이성만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간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더 의지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잠언 3:5~7)"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세상을 살아갈 때 의미 없이 떠내려가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다.
(3) 허무주의를 극복한다.
허무주의가 등장하게 된 원인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신학자, 수학자, 철학자로 알려진 파스칼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이 갈등과 무력함은 한때 사람에게 진정한 행복이 있었으나, 지금은 빈 공간과 윤곽만 남았음을 선언하는 것 외에 무엇이겠는가? 이 무연한 심연은 무한하고 불변하는 대상으로만 채워질 수 있기 때문에, 주면에 있는 모든 것으로 채우려는 건 헛수고이다. 이곳은 오직 무한하고 불변하는 대상, 즉 하나님 한 분으로만 채울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무한으로만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런데 세상의 유한으로 이 공간을 채우려다 보니, 블랙홀 현상이 발생한다. 사람이 돈을 아무리 벌어도 만족하지 못하고, 쾌락을 아무리 누려도 만족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다. 사람은 욕심을 부리면 부릴수록 더 심해진다. 가령 목이 마르다고 해서 바닷물을 계속 마시면 목이 더 마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러한 일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분을 영접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세상사람들은 만족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방황하고 있다. 물질로, 지식으로, 권력으로, 명예로, 미모로, 자식으로, 성욕으로 이 빈 공간을 채우려고 했지만, 결과는 더욱 허무할 뿐이다. 남과 비교해서 상대적 만족감을 느낄 뿐이지, 마음속의 근원적인 허무감은 채우지 못한다.
믿음의 사람들이 왜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단순히 그들이 지옥에 가는 것이 불쌍해서인가?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생수인 예수님을 놔두고 계속 바닷물로 갈증을 해소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41)"라고 말씀하셨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세상 것으로 절대 해소하지 못하는, 갈증을 해소하는 정답을 제시하고 있다.
(4) 세속주의적 세계관을 극복한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세속주의적 세계관 혹은 철학적 세계관에 매몰되어 있다. 교회사를 보면 기독교는 항상 세속주의를 극복해 왔고, 또한 세속주의와 싸워 이긴 쪽은 기독교였다. 이 세상의 쾌락과 철학을 우상으로 삼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요한 14:6)"을 부인하는 그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세계관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거나, 이 한 세상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 하고 즐기다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그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태 11:28)"고 하시며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은 다 지나갔음이러라(요한계시록 21:4)"고 영생(천국)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