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구조는 창조-타락-구속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전제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 또 아담의 불순종 이후 세계가 타락의 상태라는 전제도 가지고 있다. 또 우리는 세상이 타락했지만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에 대해 이미 승리했고 장차 주의 재림으로 구원이 완성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만물을 무에서 유로 창조했다는 관점을 갖는다. 이에 따라 기독교는 성경에 근거하여 유신론, 곧 가장 실재이며 최초의 존재를 오직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기독교가 유신론, 즉 '오직 신만이 존재한다'라고 말할 때 항상 '신의 존재여부'에만 초점을 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신인가'에 더 초점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존재한다고 해도 '어떤 하나님인가'를 규정하지 않으면 우상숭배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는 유신론을 말하지만,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 유무보다 "어떤 하나님인가"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도전
1. 유물론과 진화론
오늘날 진화론자와 유물론자들은 '물질에서 출발하여 세계가 만들어졌다'라고 주장한다. 물질로부터 세상을 창조한 신은 '우연'이다. 세상은 우연의 섭리에 의해 진화하여 세계가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이 관점은 하나님의 창조적 세계관을 부정한다. 따라서 이 세상의 기원이 "하나님의 창조인가?"와 "자연발생적 진화인가?"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전제이고, 이들 사이에는 아직도 맹렬한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유물론에서의 유는 있을 유有가 아닌 오직 유唯이다. 이 용어의 의미는 "세상의 근원이 되는 실재는 오직 물질이다"라는 의미이다. 유물론자들은 '영적인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오든 것이 물질에 의해 생긴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자연스럽게 진화론으로 세상의 기원을 이해하게 된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하나님께서 물질을 창조하셨다'라고 말하면서, 창조된 물질이 점진적인 진화를 통해 동물을 거쳐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럴 경우, 이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닌 '우연'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유물론에서는 사람에게 도덕성을 강조할 근본적인 이유가 없다. 본래 기독교에서 사람의 도덕성을 말하는 이유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전제가 무너진다면 물질에서 진화한 인간에게 무슨 도덕성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2. 유심론
철학에는 유물론의 정반대인 유심론이 있다. 이는 세계의 근원을 오직 정신(관념)으로 이해하는 견해이다. 헤겔은 태초에 세계에는 '세계정신'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헤겔에게 있어서 세계정신은 한 방울의 마음이라고 볼 수 있는 ' 작은 정신'의 집합체가 세계정신인 것이다. 그래서 이 작은 정신들이 큰 정신인 '세계정신'으로 합일될 때, 그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이들의 전제는 결국 정신이다. 오직 정신만 세계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유심론은 오늘날 현대교회 안에도 많이 들어와 있다. 예를 들어서, 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라는 뜻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라는 사상이 있다. 이 사상은 교회에서 믿음과 혼돈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흔히 그리스도인들이 "믿음대로 될 것이다"라고 말할 때, 이 고백은 자기 마음을 중심에 두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믿는 대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체유심조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심지어 성경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자기의 뜻을 포장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성경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쉬운 예로, 사업을 시작한 그리스도인이 "사업이 대박 날 줄 믿습니다"라는 기도를 한다고 하자. 이건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킨 유심론에 불과하다. 기독교 세계관은 자기 마음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에 철저히 근거하여, 그분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똑같이 믿음을 말해도, 그 내용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인지, 혹은 자기 마음의 생각인지를 잘 파악해야 유심론과 기독교 세계관과의 분별이 가능하다.
가장 최초의 존재가 물질일까?(유물론) 정신인가?(유심론) 아니면 신인가?(유신론)의 답이 왜 이렇게 중요할 까? 그 이유는 '하나로 전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관한 철학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철학에서는 이를 '하나와 전체' 즉 '일(一)과 다(多)'의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이 문제는 사람의 인생사와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어떤 사람은 '돈(하나)만 있으면 모든 문제(전체)는 다 해결될 수 있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돈 버는 일에만 집중하여 살았다. 그런데 노년에 그가 인생을 돌아보면서 "돈으로 안 되는 게 있구나. 돈으로 가족의 행복을 살 수가 없구나. 돈으로도 안 되는 게 생각보다 많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철학에서도, 또 사람의 인생에서도 '어떤 하나가 전체를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은 좀처럼 찾아내기가 어렵다. 철학이 유심론과 유물론이라는 두 견해를 두고 헤아릴 수 없는 논쟁과 학설을 만들어 냈다는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하나가 전체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유심론으로 전체를, 유물론으로 전체를 결코 해석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하나와 전체의 문제는 인류에게 영원토록 풀리지 않는 숙제에 해당할까? 그렇지는 않다. 이를 인류역사상 유일하게 해결하신 분이 계신다.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고(하나), 인간의 인생사 모두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진행되고 있다(전체). 즉 하나님이 인생의 모든 문제의 열쇠를 쥐고 계신 분이시다. 그러나 사람들은 참된 답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보다, 하나님을 빼놓고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지만, 오히려 문제를 더욱 키울 뿐이다.
앞서 언급한 유물론, 유심론, 유신론은 '실재론'에 관한 논쟁이고, 우리가 이어서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는 '인식론'의 문제이다.
"참으로 존재하는 분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 대한 답은 또 세 가지로 갈라진다. 먼저 철학은 인식론에 대한 답으로 한편은 이성주의, 다른 한편은 경험주의를 말한다. 반면에 철학과는 달리 기독교는 이성주의와 경험주의를 말하지 않고 성령의 조명을 말한다.
물론 여기서 성령의 조명은 사람의 이성과 경험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조명을 비추어 사람의 이성과 경험을 올바로 사용하도록 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도록 이끄신다.
타락 이후로 사람의 이성과 경험을 통한 해석에는 오류가 일어난다. 대표적인 예로 학교에서 함께 생활하는 학생들을 보면 똑같은 경험을 하고 또 이성을 통해 같은 학문을 배우지만, 서로 다른 해석을 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또 모든 학생이 똑같은 수업을 똑같이 집중해서 잘 들어도 시험점수는 똑같지 않다. 같은 경험이 같은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또는 거의 같은 이성을 가진 사람도 똑같은 상황에서 다른 대처를 한다. 이는 인간의 경험과 이성에는 불완전함과 오류의 여지가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왜냐하면 타락한 사람의 이성 자체는 배운 지식을 해석하는 일에 오류를 일으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사람의 이성과 경험이 이렇게 불완전할지라도 성령께서는 성령의 조명을 통해 바른 인식으로 이것들을 교정하신다.
예를 들어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하게 살았을까?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인생을 살았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사람들은 종종 과거의 경험을 잘못 해석하여 후회하거나, 다른 사람 탓으로 그 잘못을 돌리고, 끝없는 원망의 늪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 경험을 조명해 주시면 "아! 하나님께로 오라는 신호였구나" 혹은 "하나님께서 나를 다듬고 단련시키기 위해서였구나" 혹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에게 보여주시기 원하셨구나"등으로 경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발생하게 된다.
어떤 사건이라도 경험으로, 혹은 이성의 조명만으로 올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 참된 실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성령께서 사람의 이성과 경험을 올바르게 조명해 주실 때에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