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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 5(성선설과 성악설의 문제점)

김민호 저 "기독교 세계관"

by 김해경

1. 성선설의 문제점: 모든 사람은 선하게 태어난다?

동양의 철학자 중 성선설을 주장한 대표적 학자는 맹자이다. 그는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선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성선설에는 문제가 있다. 모든 사람은 선하게 태어났는데 왜 죄를 짓는가? 이에 대해 맹자는 "원래 모든 사람이 선하게 태어나지만 가정환경이나 사회구조, 혹은 국가의 제도로 인해 악해졌다"라고 답한다. 언뜻 이런 대답은 그럴싸하게 보인다. 하지만 성선설적 사고는 모든 악의 문제를 "남 탓"으로 돌리게 된다. 성선설은 "나는 본래 선한 존재야"라는 전제를 가지므로, 내 삶의 모든 불행과 악의 원인을 꼭 외부에서만 찾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또한 공산주의 유물론에 물든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예전에 로빈 윌리엄스와 맷 데이먼이 주인공으로 나왔던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이라는 오래된 영화가 있다. 여기서 데이먼은 탁월한 수학적 재능을 가졌으나 불우한 환경에서 살았고, 이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불행하게 되었다고 비관한다. 윌리엄스는 이런 그를 눈물로 품어주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한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이는 영화의 명대사 중 하나로 손꼽히지만, 이 대사는 아주 위험한 사고를 반영한다. 왜냐하면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된 책임이 자신에게는 전혀 없고, 오직 다른 사람과 환경에만 있다는 성선설의 사고이기 때문이다. 과연 이 청년의 인생이 이렇게 된 것은 다른 사람과 환경만의 문제일까?


2. 성악설의 문제점:악은 교육으로 해결된다?

성선설과 정반대인 성악설이 있다. 성악설을 주장한 동양의 대표적인 철학자는 순자이다. 성악설은 언뜻 기독교의 성경적 가르침과 유사해 보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성경이 인간의 전적인 타락을 가르치는 것과 유사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자의 성악설은 기독교가 말하는 악의 개념과 전혀 다르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순자의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라는 표현은 기독교와 흡사해 보이지만, 그는 악에 대한 해결책으로 교육, 학문적 수양, 혹은 훈련을 제시한다. 어쩌면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는 전제만큼은 기독교와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악에 대한 성경의 개념과 해결책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성경은 악이 교육과 훈련이 아닌, 오직 은혜로만 해결된다고 가르친다. 아울러 순자의 성악설은 성경적이지도 않을뿐더러, 잘못된 가설임이 실천적으로도 확인된다. 한번 당신의 주위를 둘러보라. 교육과 훈련을 많이 받은 사람이 정말 더 선한가? 또 선하게 변화하고 있는가?


3. 선악은 행위 이전에 관계의 문제이다.

성경에서 선과 악에 관한 문제는 근본 행위가 아닌 관계의 문제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깨어졌으므로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성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도덕성을 개선하려는 훈련이나 교육만으로는 악을 해결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조차 "교인을 반복해서 교육하면 언젠가 좋은 열매가 나올 거야."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성경이 아닌 순자의 관점에서 나오는 사고이다.


죄는 윤리 이전의 문제이다. 윤리는 오히려 죄의 결과이다. 세상에서의 죄는, 위키백과에 따르면, '죄는 규범이나 윤리에서 어긋나거나 그에 반하는 행위를 말한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4문]에서 죄란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서 부족하거나 혹은 어기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성경적으로 '죄는 하나님의 뜻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헬라어로 죄는 '하마르티아'인데, 이는 '과녁에 못 미치거나 과녁을 벗어났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 여기서 벗어날 때,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관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미치지 못하거나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날 때가 죄이므로,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한 근본적인 전제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선에서 출발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윤리 도덕, 교육, 훈련만을 강조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참으로 실존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인식하게 되면 그 사람의 윤리도덕은 자연히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역순으로 접근한다. 이것이 전형적인 인본주의적 접근이다. 우리가 윤리를 많이 행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비성경적이다. 믿음의 사람은 예배, 성경말씀, 기도를 통해 본인이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바뀐다!


성경의 관심은 항상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는데에 있다. 타락한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으므로 죄가 무엇인지 분간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무엇이 죄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도록 하는 것이 전제이다. 전제가 무너지면 결단코 아무런 해결책을 얻지 못한다.


4. 기독교와 이방 철학의 차이:악의 전제

악은 근본적으로 선 자체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이를 해결하지 않고 윤리만 바꾸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것은 마치 오염된 물의 근원을 간과 하고 외부의 물만을 정화하려는 노력과 같다. 더러운 물이 나오지 않도록 하려면 근원을 정화해야 한다. 그러나 세속철학은 이러한 근원, 곧 전제를 무시한다. 그들은 "어떻게 인간은 자력으로 선해질 수 있는가? 혹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가"만 묻는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근원, 즉 전제에 무관심하다. 그러나 복음은 이 전제를 바꾸도록 다그친다. 악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며 선 자체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이 관계가 먼저 회복되어야만 윤리적 삶도 뒤따른다. 이것이 기독교와 이방 철학이 악을 해결하는 방식의 차이이다.


5. 당신이 인식하는 하나님, 또 참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인가?

특정 사람의 가치론에 해당하는 윤리를 확인하면 그 사람이 어떤 식으로 그 대상(실재론)을 인식하고 있는지를 간파할 수 있다. 또 미학에서도 어떤 식으로 그 대상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그 대상을 인식하는 수준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락으로, 뉴에이지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자. 미학적 관점에서 볼 때 락은 성행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뉴에이지는 신비적 명상을 위해서 만들어진 음악이고, 힙합이나 테크노도 모두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자극하려고 만들어진 음악이다. 따라서 '이런 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게 너무 좋아"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당신이 인식하는 하나님, 또 참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인가?"


대다수의 성도에게 발견되는 흥미로운 점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는데,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 성경은 참으로 실재하시는 하나님을 참되게 인식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외적 반응을 몇 가지 제시한다.

첫째. 거룩이다. 둘째 하나님을 경외함과 셋째 이웃사랑이다.

만일 믿음의 사람에게 거룩의 삶이 없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도 없으며 이웃 사랑에 대한 어떤 실천적 노력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가 인식하는 하나님은 적어도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처럼 실재론, 인식론, 가치론의 접근방식은 우리가 참으로 인식하는 하나님이 누구인지 확인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외부에 나타난 열매, 곧 윤리나 미학적 행위를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의 인식론과 실재론을 검토해 볼 수 있다.


미학은 음악뿐만 아니라 미술도 포함한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을 춤으로 섬길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이런 미학적 접근은 '금송아지 사건(출 32장)'에서 나타난다. 이는 하나님을 춤추며 유흥의 방식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문제였다. 그러나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는 모세를 통해서 나타난다.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가 참으로 실재하는 하나님을 만나고 인식했다. 그리고 십계명 돌판을 들고 내려왔다. 즉 모세는 참된 실재이신 하나님을 인식한 뒤, 그 결과의 가치론으로서 십계명을 받은 것이다. 말씀을 귀히 여기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실재하는 하나님에 대한 가치론이다.


이처럼 윤리학과 미학은 참된 실재에 대한 인식의 외적 반응에 속한다.


6. 영지주의와 기독교의 차이: 신적 본질이 어디 있는가?

종교철학자 칼빈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자신을 알 수 없다'라고 했다. 이처럼 기독교 인식론에서는 하나님을 알아야 사람 자신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정반대의 주장을 한다. '나를 아는 만큼 내가 신이 된다'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 양자의 근본적인 차이는 "신적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에 있다. 기독교 인식론에서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이해하며, 하나님을 기준으로 '내가 이렇게 타락한 존재이구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반면 영지주의 혹은 유심론은 사람 자신에게 신적 본질이 있다고 생각하므로 사람이 신이 된다고 이해한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명상이나 체험을 중요시한다.


성경적 기독교는 결단코 명상이 아니다. 로마 가톨릭이 말하는 관상기도도 사실은 명상의 일종이다. 관상의 기원은 주후 2세기 교부였던 오리겐에게서 발견되는데, 그는 그 당시의 영지주의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이 영향이 오리겐을 거쳐 로마 가톨릭에 침투했고, 이런 영지주의와 신플라톤주의의 사상으로 성경의 용어를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엄밀히 말해 로마 가톨릭은 플라톤주의, 신플라톤주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혼합하여, 그걸로 하나의 종교적 체계를 만들었다. 오늘날 많은 신학자가 로마 가톨릭을 이단이라기보다 이방 종교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지주의자들이나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인식론, 곧 '내가 어떻게 더 신에 가까워지고 신과 합일할 수 있는가?'의 유심론적 생각은 성경에서 분명하게 죄에 해당한다. 이는 뱀이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까 하노라'라고 했던 사고의 연장선에 있다. 하와를 유혹했던 사탄은 지금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네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으라!" 이게 바로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영적 지식, 즉 영지(gnosis)인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원하지만, 결단코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안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사랑과 공의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믿음의 사람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것을, 믿음의 사람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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