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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 7(기독교와 인본주의 1)

김민호 저 "기독교 세계관"

by 김해경

1. 인본주의의 발흥: 인본주의는 14세기 말엽에 발흥한 르네상스와 연관이 있다. 르네상스 운동은 종종 '고전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로 요약된다. 이는 주전 5세기경의 대그리스 철학을 부활시키려는 문예부흥 운동이다.


흔히 사람들은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된 이유를 중세 교회의 지나친 '신중심'에 대한 반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세 교회의 신 중심은 엄밀한 의미의 신 중심이 아니다. '신 중심'은 곧 '계시(성경) 중심'이다. 그러나 중세교회는 계시(성경) 중심이 전혀 아니다. 그들은 성경말씀과 성령의 조명을 신앙의 중심적 위치에 놓지 않았다.


중세의 이런 현상은 중세교회의 대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세상을 상층부와 하층부 즉 은혜와 자연으로 구분하고 양자의 균형을 시도한 사람이다. 그의 신학은 성경 계시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 오히려 성경적 신학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반으로 한 철학적 신학이다.


아퀴나스는 인간의 의지는 타락하였으나 지성은 타락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런 신학에서 비롯된 중세교회의 모근 가르침과 성상숭배, 그 외의 비성경적 예식들은 수많은 영혼을 병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신학의 강조에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르네상스 운동이 발흥했다. 르네상스 운동은 결국 '철학화된 신학으로부터 도망가자, 철학화된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지자' 그리고 '다시 예전의 소트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이다.


2. 두 종류의 인본주의: 하나님 중심의 인문주의와 사람중심의 인본주의

인본주의, 곧 르네상스의 정신은 '사람을 사람답게'라는 구호로 정리된다. 이 구호는 일종의 'X는 X 답게'라는 철학적 개념과 관련이 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을 본연의 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르네상스에 있어서 본연의 자리는 성경과 무관하고, 오히려 신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교만한 도전이었다. 이런 점에서 인본주의는 매우 비성경적이다.


한편 르네상의 '사람을 사람답게'라는 구호는 흥미롭게도 종교개혁과 유관하다. 마틴 루터가 시도한 개혁은 사실 X에 하나님을 넣고 '하나님을 하나님답게'라는 외침이었다. 따라서 르네상스 운동은 두 개의 물줄기로 흘렀다고 볼 수 있다. 즉 14세기에는 '사람을 사람답게'라는 인간중심의 인문주의, 즉 말 그대로 인본주의이며, 16세기에는 '하나님을 하나님답게'라는 하나님 중심의 인문주의이다.


3. 인본주의의 결과물:자율주의와 계몽주의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 곧 '사람을 사람답게'를 외칠 때 이 사람들은 '이제 법을 신이 정하지 않는다. 법은 사람이 정한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율주의가 나오게 되는데, 자율주의는 내가 스스로 법이 된다는 뜻이다. 이전에는 신 중심적 사고방식이었다면, 이제는 철저하게 사람 중심적 사고방식이 된 것이다. 훗날 이것은 계몽주의라 부르는 휴머니즘 운동으로 발전했다. 오늘날의 휴머니즘은 인간은 인간 그 자체로 충분하며 신 따위는 필요 없다는 사상이다.


계몽주의로 이어졌을 때 윤리적 타락은 오히려 이루 말할 수 없이 극도에 이르렀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볼테르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극도로 비판할 뿐만 아니라, 쾌락주의적 도덕성에 근거한 에로티시즘은 주장했다. 그의 성적 비행은 하나님의 자리를 사람이 빼앗아서 자신이 법이 되려는 자율주의적 사고의 결과물인 것이다.


4. 하나님 중심의 인문주의: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반면 계몽주의의 정반대에는 종교개혁 운동이 있었다. 종교개혁의 다섯 표어 중 하나로 '오직 성경, 성경으로 돌아가자'이다. 말씀과 성령의 조명으로 돌아감으로 '하나님을 하나님답게'를 먼저 참되게 실현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16세기에 시작된 종교개혁의 정신이다.


5. 기독교적 전제:계시와 성령의 조명

기독교적 전제는 언제나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특별계시)과 자연만물(일반계시)을 통해 자신을 밝히 드러내심으로, 믿음의 사람은 계시에 기초하여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섬긴다. 물론 계시가 제 역할을 하려면 반드시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다. 성경과 자연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지만, 성령의 조명이 없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방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선명한 사진이 걸려 있는데, 방이 어두우면 그 사진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결국 그 방에는 빛이 비추어져야 한다. 빛이 비쳐야 비로소 시신경이라는 인식 기관이 제 역할을 한다. 이처럼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드러낸다고 해도 사람의 마음이 어두워져 있다면 그 계시를 인식할 수 없다. 아무리 이성이나 경험이라는 감각 기관이 발달해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분간하지 못한다. 그래서 성령께서 사람의 마음에 빛으로 조명하셔야만 그것이 하나님의 광채인지를 깨닫게 된다.


특별계시인 성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신학박사들이 많이 읽는다고, 또는 원어로 읽는다고 해서 더 잘 깨달아 믿게 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도 반드시 성령의 조명이 필요하다. 대표적인 예로 오늘날 성경 비평에 몰두하는 수많은 자유주의 학자들은 성경의 원어에 능숙하며 또 성경지식도 방대하다. 그러나 그들 대다수는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할 뿐 아니라 믿지도 못한다. 그들에게 성경은 고대 문헌 중 하나일 뿐이다. 이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바로 성령의 조명이다.


기독교가 세상을 바라보는 전제는 계시와 성령의 조명이다. 믿음의 사람이 세상을 바라볼 때 하나님의 계시(성경말씀)에 기초하여 성령의 조명을 통해 본다. 이는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교육 등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 그래서 기독교적 정치관, 경제관, 문화관, 사회관, 교육관이 나오게 된다. 물론 '기독교적'이라는 말을 갖다 붙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적이라는 말은 항상 계시로서 성경말씀과 성령의 조명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인본주의로 흘러가게 된다.


6. 기독교로 둔갑한 인본주의: 이성주의와 경건주의

교회의 역사 속에는 항상 이성주의자와 경건주의자라는 두 부류가 존재했다. 이성주의자는 성경을 지나치게 이성에 의존하여 해석하려는 자들이다. 실제로 17~18세기 많은 신학자들이 이런 생각을 가졌다. 그들은 "이성의 조명만으로 성경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어. 기도하지 않아도 성령의 조명이 없어도 얼마든지 성경을 이해할 수 있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의 이성에 전지성을 부여하여 이성만 의존해도 충분하다는 경향은 바로 인본주의가 된다.


경건주의는 이성을 배격하고 내면의 빛 혹은 감정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앙 태도이다. 이에 대표적인 예가 퀘이커 교도다. 그들은 명상 속에 자신의 감정이 느끼는 대로 하나님의 임재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결국 신비주의라는 파국적인 국면까지 발전한다. 인간적인 감각이나 직관을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 이것도 역시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점에서 인본주의와 전혀 다르지 않다.


참된 기독교의 전제는 계시와 성령의 조명이고, 반드시 양자가 동반되어야 하며, 둘 중 어느 하나도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7. 인본주의의 전제: 경험과 이성

인본주의의 전제는 경험과 이성이다. 경험주의의 특징은 스스로 경험한 것만을 믿는 것이다. 사실 타인의 경험담은 신뢰할 수 없어도 스스로 겪은 경험은 신뢰할 만하다. 말 그대로 경험했기 때문에 주관적으로는 진짜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스스로 겪은 경험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경험이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경험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길거리를 가다가 만 원을 주었다 하자. 만 원을 줍게 되면 어떤 사람은 "너무 기쁘다. 내가 마침 만원이 필요했어!"라고 반응한다. 한편 또 다른 한 사람은 똑같은 사건을 경험했지만 "너무 슬프다. 이 돈을 잃어버린 사람은 얼마나 마음이 괴로울까?"라고 반응한다. 경험 자체보다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해가 완전히 다르게 된다. 버트런드 러셀은 닭에 대한 예화로 경험주의의 오류를 정확하게 지적했는데, 요약하자면 과거의 반복된 경험들이 반드시 미래에도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같은 경험을 여러 번 했다고 해도 내일은 다른 경험이 우리에게 닥칠 수 있다는 말이다.


한편 이성주의자들은 초자연적 사건이나 영적 세계를 도무지 믿지 못한다. 특히 성경이 가르치는 천국과 지옥, 또 몸의 부활과 같은 사건들은 절대 믿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이성으로 검증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으로 검증할 수 있는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이성주의자들은 이성에 합한 것만 믿지만, 그들의 한계는 명백하다.


8. 인본주의의 실패: 경험과 이성으로 진리를 추구할 수 없다.

경험주의와 이성주의가 각각 한계에 부딪히자 이후 어떤 철학자는 양자를 합쳐서 진리를 추구하려고 시도했다. 그가 바로 유명한 칸트이다. 그런데 칸트의 노력도 결국 실패로 돌아간다. 그래서 훗날에는 "경험과 이성을 적절히 섞어도 진리를 알 수 없으므로 절대 진리는 없다"라고 주장하는 헤겔이 등장한다. 따라서 인본주의자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전제, 곧 세계관으로서 이성과 경험으로 진리를 추구했지만 그들은 언제나 실패했다.


그들은 왜 실패하는가? 이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경험에 대한 해석이 완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성 역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 자신에게 중심을 둔 인본주의는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인본주의와 기독교의 차이는 '경험이냐 이성이냐'의 문제보다 '타락한 인간의 경험과 이성에 하나님의 조명이 있는가'의 문제이다.


9. 인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 철저한 자기 중심주의

인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을 만물의 중심으로 보는 데에 있다. 세계의 중심은 내가 되기 때문에 인본주의자들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타인은 항상 나보다 다음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인본주의가 왕성한 곳에서는 여기저기서 사람들 간에 갈등과 분열이 유발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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