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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 8(기독교와 인본주의 2)

김민호 저 "기독교 세계관"

by 김해경

1. 인본주의는 결국 자기 행복을 추구한다.

철학이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다. 이런 차원에서 인본주의자의 자기중심이라는 전제는 반드시 자기 행복이라는 목적으로 귀결된다. 그들은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행동을 통해 결국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일에 집중한다. 그들은 겉으로는 경험과 이성을 중심에 둔다고 하지만, 배후에는 항상 자신의 행복을 중심에 둔다. 그래서 인본주의 철학은 "인간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에 큰 관심을 가졌고, 이로부터 다양한 가설들이 출현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설도 자기 행복만을 목적으로 추구하는 대표적인 예에 해당한다. 이런 차원에서 칸트의 절대적인 윤리에 대한 추구도 결국 자신이 행복해지기를 위한 방편일 뿐이다.


그렇다면 성경은 행복을 어떻게 말하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하나님 중심으로 삶을 사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으로 살면 결단코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온갖 쾌락을 추구하는 쾌락주의자들은 결국 허무주의에 도달하고 또 허무주의자들은 자살에 이르고 만다. 이처럼 인본주의의 결과는 언제나 절망이다. 자기중심적인 삶에는 행복이 아닌 허무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의 경험이나 이성에 비춰볼 때 성경대로 사는 삶,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삶은 무척 불행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작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살면 정말 행복하다. 이는 칸트의 주장처럼 윤리적으로 살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 말씀의 실천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성경은 인생의 목적을 행복에 두지 않으면 비로소 행복을 얻게 된다는 논리이다. 오히려 목적을 행복에 두기 때문에 행복하지도 못하고 이웃까지 불행하게 만든다.


실제 역사 속에서 "사람의 행복이 곧 선이다"라는 생각을 품은 자들이 출현했다. 그들이 바로 '프랑스혁명'을 일으켰던 혁명가들이다. 당시 그들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선이고, 불행하게 만들면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찾아서 죽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았고 도리어 그들 자신조차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하는 끔찍한 불행에 빠지고 말았다.


2.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인본주의

왜 인본주의는 불행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는가? 근본적으로 사람의 삶의 중심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계셔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 삶의 중심에 하나님 자신을 두어야 비로소 행복하도록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런데 뱀은 하와에게 '네가 하나님처럼 되라'라는 인본주의적 사고로 유혹했고, 그 결과 인류는 불행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인본주의는 하나님의 창조순리(하나님을 중심에 모심)를 벗어난 것으로, 여기에는 참된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다.


블로흐(E.Bloch)는 "천국은 비어있고 인간이 바로 하나님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것이 인본주의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요즘 나오는 인본주의 철학의 핵심은 다 사람이 신이라는데 초점이 맞춰진다. 사람이 하나님 자리를 찬탈하면 낙원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인본주의 사상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간혹 어떤 이들은 "우리가 행복하겠다는데 뭐가 잘못이야?"라고 말한다. 물론 행복의 추구 자체를 성경이 정죄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행복의 기준을 왜곡하려는 자세를 피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사람이 불행하게 사는 것을 결단코 원치 않으셨다. 그리스도인은 행복을 회피하고 불행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다. 도리어 성령의 조명을 비추어 말씀을 따르는 삶을 추구하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 중심이 되면 우리는 진짜 행복해질 수 있다."라고 믿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담 이후로 타락한 사람은 경험과 이성이 모두 부패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타락한 경험과 이성에 비추어서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어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경험주의와 이성주의(합리주의)를 따르는 자들은 결국 불행했으며, 그들은 허무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문제의 핵심은 무엇인가? 타락한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 추구'가 아니라 '행복추구' 자체가 목적이 되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하와처럼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이런 태도를 인본주의 철학이라고 한다.


3. 인본주의의 결과는 불행이다

사람이 행복을 추구하다 보면 하나의 무리를 이루는 현상이 나타난다. "우리가 함께 행복해지자. 우리가 모두 행복해질 수 있다!" 성경에도 이와 같은 사건이 있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사람들이 모여서 나름대로 행복을 추구한 것, 이것이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이다. 오늘날에도 이와 유사한 사조로 공리주의, 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바벨탑 사건의 연장선처럼 하나님을 배제하고 사람들만의 힘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사고방식을 따른다.


이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부자들의 소유를 빼앗아서 모두가 똑같이 나누면 행복하지 않을까?' 이건 엄밀하게 모두가 행복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뺏기는 누군가는 불행하기 마련이다. 또 모두의 행복을 위해 부자들의 소유를 빼앗아 골고루 나누면 다수가 행복할 것처럼 보이지만, 부자들의 것을 다 빼앗으면 부자가 사라지기 때문에 결국 빼앗을 부자도 없어진다. 이렇게 빼앗을 부자가 사라지면 어디서 빼앗아 골고루 나누겠는가? 서로 빼앗아 나눌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빼앗기는 불행은 모두의 것이 되고 만다.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 모두가 착취당하며 불행하게 되는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모든 사람이 평등해야 한다는 실현 불가능한 주장에서 비롯된다. 평등하기 위해 서로 빼앗다 보면 빼앗을 자원이 다 사라지고, 모두가 평등하게 가난해진다. 이런 사실은 현실 공산주의라고 할 수 있는 북한을 비롯한 역대 공산주의가 잘 보여준다.


4. 하나님은 차이, 곧 불평등을 통해 세상을 조화롭게 만드셨다.

한국의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은 인본주의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현대 신학의 사조들이다. 이들은 부유한 자들은 남의 것을 빼앗아 행복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평등을 주장한다. 계급이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평등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언뜻 평등을 이야기하면 성경적인 것같이 들린다. 그러나 성경은 경제적 평등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마 26:11)"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가난한 자가 항상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섭리하셔서, 그리스도인이 섬길 대상으로 삼도록 가르치신 것이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은 생태적으로도 평등하지 않다. 러셀 커크는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평등은 인위적인 산물이지 자연적인 상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을 보라. 모두가 키가 같은가? 다 똑같이 생겼는가? 지능이 다 똑같은가? 성격과 취향이 같은가? 심지어 쌍둥이 간에도 차이가 존재한다. 하나님은 이 땅에 창조하신 사람들을 결코 평등하게 창조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은 서로 다르고, 저마다 차이가 존재한다.


왜 하나님은 이런 차이, 불평등을 허락하셨는가?

그 이유는 사랑으로 이웃을 섬길 여지를 주시기 위함이다.


평등하다면 섬김을 받을, 섬김을 줄 이유가 없다. 사랑의 섬김과 희생을 통해 평등케 하려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이것을 바울은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한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8:13~14)"라고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다.


바울의 가르침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로 느껴지는가? 결코 아니다. 이는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과 분배의 주체가 정부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과 사랑이라는 점에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평등이라 하지 않고 조화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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