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저 "기독교 세계관"
1. 기독교와 사회: 성속의 이원론 문제
작금의 기독교는 사회를 향해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러 질타를 받는다. 사실상 오늘날 기독교는 사회에서 무가치한 종교처럼 인식이 된다. 그러면 기독교가 이러한 평가를 받는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물론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지만 그중 하나로 성속 이원론을 들 수 있다. 쉽게 말해 "기독교는 종교적 예식만 잘하면 되고 사회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어"라는 사고방식이다. 이것이 한동안 당연한 듯 기독교계 안에 팽배했다.
2.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거하지만 속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빛(마 5:13~14)"이라고 말씀하셨다. 기독교는 세상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 불교는 세상과 물리적으로 떨어져 세속으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하지만,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교회는 세상에 거하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을 규정하는 아주 중요한 명제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부터 물리적이 아니라 영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누가 어둠을 밝히겠는가? 그리스도인이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누가 맛을 내겠는가? 만일 믿음의 사람이 사회, 정치, 교육의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그 방면으로 기독교적 영향을 끼치려 할 때 그를 세속적인 사람으로 취급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플라톤주의적이고 불교적인 인식이다.
실제로 이런 이원론적 사고를 취하는 교파가 바로 로마 가톨릭이다. 그들은 성과 속을 분명하게 구별한다. 그래서 종교적 영역은 거룩하고 그 외에는 거룩하지 않으며 세속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실은 로마 가톨릭이 신부를 성직이라고 부르고 평신도들의 직업을 세속적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개신교는 성과 속을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모든 직업과 영역을 다 거룩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성과 속을 구분하지 않는 일원론적 사고방식을 취한다.
3. 기독교는 전체보다 개인이 우선이다.
사회에 대해 말할 때,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대상은 개인이다. 만일 개인을 무시한 채 사회를 우선시한다면 그것은 전체주의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사회는 개인을 사회의 부속품이나 소모품 정도로 취급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나 자유민주주의 국가는 항상 사회를 생각할 때 개인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하지만 공산주의나 봉건주의 국가에서는 개인보다 전체를 먼저 고려한다. 이는 개인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일이다.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일어나 유럽에서 점차 확산되자, 국가의 봉건 제도는 무너졌고, 비로소 개인이라는 존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점에서 뱅모 박성현은 '유럽의 개인은 기독교의 자식'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산물인 기독교는 개인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이것을 개인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다. 여기서 상당수 사람들이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주의는 인간의 존엄성과 개인의 자유에 관한 문제를 염두에 둔 개념으로, 법 안에서 인간의 독립적인 사고와 활동을 존중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사회에서 책임을 말할 때, 간혹 이런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단체에서 과격하게 시위를 하다가 한 상점을 망가뜨렸다고 하자. 이때 전체주의적 사고를 지닌 사람들은 이 상점의 손해나 피해를 끼친 책임을 전체에 떠 넘긴다.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개인은 슬며시 빠져나간다. 반면 기독교적 사고는 항상 사회의 책임에 있어서 개인을 먼저 고려한다. 이를테면 '한국사회가 굉장히 혼란해졌다'라는 문제를 고려할 때, 우리는 사회 전체에 책임을 떠넘기기보다, 먼저 내 개인의 죄와 책임을 참회(회개)하며 시작한다. '내가 기도하지 않았구나. 내가 이 문제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구나.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았구나' 이렇게 개인의 각성과 인식을 먼저 앞세우는 것이 기독교적 사고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전제에서 개인은 상당히 중요하며 우선시 된다.
문화에 대한 접근방식도 기독교는 개인의 변화를 우선시한다 한 개인이 변하면 변화한 개인들이 사회의 문화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문화를 통해 전도하는 것보다
개인의 전도를 통해 사회와 문화를 바꾸는데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언제부터인가 개인의 신앙보다 전체 곧 '교회가 잘 움직여지고 있는가? 교회가 원활하게 성장하는가?'에 집중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그다지 성경적이지 않다.
과거 봉건시대에는 전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도록 강요당했다.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의 목숨은 파리목숨과 같았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의 사고는 점차 바뀌었다. "개인이 변화하여 전체가 변화한다"라는 사고방식이 증가했다. 한 개인을 존귀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한 개인의 도덕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존재인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존재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기독교의 관심은 전체가 아니라
개인이 우선이다.
오늘날 밴담의 공리주의와 같은 사고들은 자꾸만 '사회 전체의 공공 이익을 위해서 개인의 희생은 당연하다'라고 속삭인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존귀하고 사람 숫자가 적으면 적을수록 덜 존귀한 것이 아니다. 개개인의 목숨과 영혼은 다 소중하다. 왜냐하면 성경에 근거할 때 모든 개개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도 이런 사실을 잘 나타낸다. 한 마리의 양을 찾는 일이 전체를 돌보는 일보다 더 앞선다. 이는 사실 전체주의적 사고에서 볼 때 굉장히 충격적인 말씀이다.
4. 기독교적 사고: 개인이 변하여 전체를 변화시킨다.
기독교적 사고, 곧 개인주의적 사고가 확립되면 교회는 교인의 숫자가 많고 적음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도리어 '한 개인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섰느냐'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면서 개인을 시작으로 전체를 본다.
만약 개인보다 전체를 우선시하면, 개인의 신앙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배당에 출석했고, 교회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전도하는가에 관심이 있게 된다. 이것이 인본주의로 나아가는 징조이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한 개인이 천하보다 귀중하니까 열심히 전도하세요!'라고 가르치지만,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이 교회 안에 들어오고 시간이 지나면, 그 영혼은 전체를 유지시키기 위한 한 조각에 불과하게 된다. 천하보다 귀중하다고 해서 전도한 한 영혼이 실족하는 문제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도리어 한 사람이 실족하더라도 교회 전체가 빨리 크게 성장하는데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개인들에게 과도한 헌금을 요구하고, 비성경적이며 비인격적인 일들을 자행하게 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전체를 중요시하는 사고방식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본모습은 결코 그렇지 않다.
기독교는 전체의 성장이 더디다 할지라도
각 개개인이 바로 서는 것을 우선시한다.
이는 마치 사람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 건강해질 때 온몸이 건강해지는 것과 같다. 전체를 중요시하는 사고방식은 개인의 존엄성이나 도덕성을 무시하고 항상 효율성을 강조한다. 전체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하느냐에 초점이 있고, 개인의 도덕성은 쉽게 간과된다. 그래서 결국 이런 부분이 교회 안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데, 교회가 성장할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된다. 도덕성보다는 성장이 중요한 것이다. 교회가 성장만 할 수 있다면 성경적인가 아닌가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교회의 옳고 그름을 따질 때에도 '그래서 당신들 교회는 몇 명이 모이는데요?'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은 결국 개인을 무시하고 전체를 중시 여기는 사고방식이 은연중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전체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은 항상 전체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개인의 변화를 통해서 구석구석이 변화하면 결국 전체가 변화된다고 믿는다.
5. 종교개혁가들의 사회변혁: 직업소명
종교개혁가들은 그리스도인의 사회변혁을 개인의 직업과 연결했다. 물론 루터와 칼빈이 이해한 직업의 소명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
먼저 루터는 한 번 정한 직업은 평생 바꾸면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칼빈은 직업의 소명이 다른 분야로 옮겨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직업의 소명이 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개혁자들이 똑같이 사회변혁의 방법으로 직업을 지적했다는 점이다. "내가 이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면 그것이 사회를 변혁시키고, 이를 통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에도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려면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고가 전형적인 천주교의 성속의 이원론이다. 성경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다양한 직업과 방법이 도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학생은 공부에 충실하면 되고, 주부는 가정에 충실하고,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그 위치에서 충실하며 부모로서 자녀에게 충실하고, 직장인은 회사에서 자기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사회의 구석구석을 거룩하게 개혁하면 된다. 자신에게 맡겨진 각 영역에서 '하나님 앞에 섰다는 신전의식(神殿意識)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바로 참된 기독교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