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저 "기독교 세계관"
1. 가정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제도이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고 가장 첫 번째로 만드신 제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한 몸으로 만드셔서, 그들을 통해 하나의 공동체로 만드신 것이 가정이다. 구약에서는 가정이 확장되어 국가를 형성하고, 신약에서는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교회라는 모습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성경이 가르치는 세 가지 제도인 가정, 교회, 국가에서, 가정은 교회의 축소판이고, 국가는 교회의 확장판이다. 이에 근거할 때, 건강한 교회는 가정과 국가의 건강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자유민주주의는 교회가 국가에 영향을 준 대표적인 예이다.
2. 가정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위해 존재한다.
가정을 교회의 축소판으로 이해한다면 가정에는 목회자가 존재한다. 그래서 남편이 가정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경견을 훈련하며 가정의 질서로서 머리의 역할을 한다. 특히 교회의 축소판으로서 가정은 사람의 즐거움과 쾌락이 아닌,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위해 존재한다. 가정의 본질적인 목적은 개인의 행복이 아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기초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한편 인본주의는 가정의 존재 목적을 인간적인 행복에서 찾는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고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을 결혼상대로 여긴다. 기독교는 불신자와의 결혼을 금하는데, 이는 개인의 행복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순위에 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본주의적 사고에 빠진 사람은 나를 행복하게만 해줄 사람을 찾기 때문에 그 상대방의 종교는 크게 고려할 사항으로 여기지 않는다. 사랑은 종교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인본주의 사고는 점차 발전하여 동성혼을 추구하고, 더 나아가 유럽권에서는 동물과의 결혼 또는 일부다처나 다부일처의 변형된 결혼 형태가 등장하게 된다. 그들에게 이런 결혼이 가능한 이유는 나의 인간적인 행복이 모든 것보다 우선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하더라도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면 쉽게 가정을 깨뜨린다. 심지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태아를 낙태시키기까지 한다. 이것은 가정에서 행복이 우상이 되면 얼마나 인간이 잔인해질 수 있고 비인간화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성경적 가정도 물론 행복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나의 인간적인 행복을 우선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인간적인 행복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 실천을 우선순위에 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은 입양을 흔하게 여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나라의 기독교 문화가 인간적인 행복보다 하나님과 이웃 사랑에 중점을 두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기독교 가정은 다산을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한다. 또한 의도했든지 안 했든지 임신했다면 결코 낙태를 선택하지 않는다. 반면 인본주의적 가정은 자신의 인간적인 행복을 앞세우고, 양육하는 비용이나 불편을 고려하여 아예 아이를 낳지 않거나 최소한의 자녀를 낳는다. 어떻게 하든지 자녀를 덜 낳고 자신의 행복을 보장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3. 가정에서 자녀의 신앙교육은 하나님의 뜻이다.
기독교 가정은 자녀를 바르게 키우는 것을 하나님 뜻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가정 안에서 자녀의 교육도 인본주의자들과 완전히 다른 자세를 취한다. 오늘날 당연히 여기는 위탁교육도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적절하다고 보기 어렵다. 본래 성경적으로 볼 때 자녀 교육은 철저히 부모 몫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반면 인본주자들은 자녀 교육에 대한 부모의 책임을 회피한다. 그래서 자녀교육을 국가나 공공기관에 쉽게 위탁하고, 자신의 편리와 문화적 즐거움과 사회적 자아 성취에 집중한다. 아이들이 학교와 친구들 사이에서 무엇을 배우든지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자녀들의 위탁교육은 진화론이나 무신론적 사고방식 같은 영적인 독소에 어린 자녀들을 아무 보호 없이 노출시키는 것과 같다. 그런데도 오늘날 무책임한 기독교 부모들은 자녀들의 영혼을 쉽게 위탁한다. 이런 현상은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인본주의가 교회 안에 침투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위탁교육은 국가가 원하는 사람을 찍어내는 공장과 같다. 국가가 원하는 사람을 유치원 때에서부터 개조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러한 흐름을 거스르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세대를 만들어 가야 한다. 가정도 이를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경건한 세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 기관에 무조건 위탁하는 교육방식에 대해 신중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이 가르치는 교육의 핵심은 부모를 통한 전수 교육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흔히 쉐마라 부르는 신명기 말씀에는 자녀 양육의 책임이 부모에게 있음을 아주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대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6~9)"
본문을 보면 하나님은 누구보다 먼저 부모의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부모의 미간에 붙여 표로 삼으라고 가르친다. 자녀의 경건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부모의 경건이 먼저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당수의 믿음의 사람들이 자녀 교육을 위탁하여 교육하는 데는 주로 부모의 신앙 경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부모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새기지 않기 때문에, 신앙 교육에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녀의 신앙을 걱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녀교육을 위해 부모부터 말씀으로 무장하라고 명령한다. 신앙은 지식으로 전수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전수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렇게 부모의 경건을 통해서 경건한 세대를 양육하도록 가정을 주신 것이다. 부모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항상 하나님 말씀을 새길 때, 자녀들의 신앙도 자라나게 된다.
부부의 관계는 계급적 우월이 아니라 질서이다.
종종 성경적 가정을 말하면,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곧 계급투쟁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가르치는 부부관계는 오히려 인격적으로 동등하며, 한 몸의 관계임을 가르친다. 물론 성경은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가르치지만, 이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우열의 관계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기능과 질서의 관계로 가르친다.
몸에서 입이 더 우월한가? 눈이 더 우월한가? 아니면 귀가 더 우월한가? 이건 우월의 문제나 계급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질서의 문제이다. 질서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리이고 순리이다. 성경이 말하는 남녀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남자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말한다. 성경은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말하면서도 이는 질서의 관계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관계라고 말한다.
4. 인본주의 사고에서 비롯된 자녀의 위탁교육
반면 인본주의자들에게 가정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다. 자기 행복을 위해서 가정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녀들에 의해 자신이 희생되고 스트레스 받는 것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자꾸 다른 기관에 위탁시킨다. 학교 및 사교육 기관에 맡기는 것을 당연시한다.
한 사례로 어떤 초등학교 5학년 여자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원을 13개 다닌다. 밤 11시가 되어야 집에 오는 그 아이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은지 원형 탈모증까지 생겼다. 그래도 열심히 한 보람이 있어서인지 시험만 치면 100점을 맞았다. 그러자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힘들어도 100점 맞으니 좋지?"
그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내가 좋은 게 아니라 엄마가 좋은 것 아닌가요? 나는 하나도 좋지 않아요!" 인본주의자들의 가정은 자녀를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이 행복하면 된다고 할 정도로 잔인하다. 물론 그들은 자녀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녀와 배우자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5. 가정이 존재하는 이유: 하나님의 영광과 경건한 세대를 양육하기 위해
결론적으로 가정은 자신의 행복을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 영광과 이웃 사랑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인본주의자들은 가정을 철저히 나의 행복이라는 사고로 접근한다. 심지오 오늘날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이 가정을 해체하려는 사람들까지 나오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개인의 행복이나 성적 욕망, 혹은 자기 필요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가정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런 인본주의적 사고를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처럼 어떻게 하면 가정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지, 또 어떻게 하면 우리 자녀들을 경건한 세대로 양육할 것인지, 더 나아가 이웃 사랑의 실천을 위해 가정을 어떻게 세워야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적이며 기독교적인 가정의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