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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 12(기독교 정치관의 세 번째 전제)

김민호 저 "기독교 세계관"

by 김해경

기독교 정치관의 세 번째 전제를 위한 질문은 "사람이 완전해질 수 있는가?"이다. 즉 " 사람이 완전하기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는가?" 아니면 "사람은 타락한 존재이며 불완전하기에 하나님의 섭리에 의존하는 존재로 보는가?"이다. 둘 중 어떤 답을 내리냐에 따라 정치에 대한 이해가 하늘과 땅으로 갈라지게 된다.


1. 미국 국새의 의미: 미완의 피라미드

달러에는 흥미롭게도 피라미드가 그려져 있다. 특히 이 피라미드를 잘 살펴보면 미완의 피라미드임을 알 수 있다. 피라미드의 위쪽이 공중에 살짝 떠 있고 여기에는 눈(eye)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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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초창기 미국의 국새를 제작했던 위원회는 왜 이런 문양을 새겨 넣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된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프리메이슨의 상징이 새겨진 것인가?


그러나 그 당시 위원회의 설명을 참조하면 힘과 지속의 상징인 피라미드의 미완은 미국의 불완전성을 의미하고, 그 위의 눈(eye)은 불완전한 미국 위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뜻한다고 한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참조하고 싶다면 다음의 사이트를 접속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https://www.samizdatkorea.org/post/unfinished-pyramid-on-the-dollar-bill


이 눈(eye)은 하나님의 섭리의 눈인데, 이를 프리메이슨의 피라미드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피라미드의 위쪽에 기록된 라틴어 문구 Annuit Coeptis(아누이트 셉티스)의 뜻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는 일을 돌보신다'라는 의미에서도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눈임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피라미드의 하단에는 다음과 같은 라틴어가 기록되어 있다. NOVUS ORDO SECLORUM(노부스 오르도 세클로룸), 이 라틴어의 뜻은 '새로운 시대의 질서'이다. 이것을 뉴에이지 사상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또한 있는데, 이 문구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서 새로운 질서가 시작됐다는 의미이다.


또 피라미드의 아래쪽에 있는 MDCCLXXVI, 이는 1776으로 미국의 독림기념일을 지칭한다. 아울러 피라미드 위에 분리 된 삼각형과 섭리안은 전통적인 자료에 비춰볼 때 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하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세대주의자나 여러 음모론자들은 달러의 피라미드가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에 의해 삽입되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일루미나티는 '완전성의 언약', 곧 '사람의 완전성'을 모토로 삼기 때문에 미완성의 피라미드와는 도무지 맞지가 않다. 아울러 프리메이슨은 미국의 국새가 만들어진 15년 이후부터 피라미드와 눈을 사용했기 때문에, 프리메이슨이 국새를 만드는데 영향을 가졌다고 생각하기에는 시간상 차이가 너무 크다.


일루미나티가 상징으로 사용하는 피라미드는 미국 국새와 달리 완성된 피라미드이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 세상을 완성할 수 있다. 정치를 완성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포한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 정치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의 정치는 불완전하며 하나님의 섭리로 다스려진다는 신본주의적 관점과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 세상의 정치를 완성할 수 있다는 인본주의적 관점이 그것이다.


2. 큰 정부와 작은 정부: '세속 정치는 완전한가? 아니면 불완전한가?'

'세속 정치가 완전한가, 불완전한가'의 문제는 작은 정부와 큰 정부와의 문제와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작은 정부는 사람에게 역할을 많이 부여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에 맡긴다는 개념이다. 이런 개념이 아담 스미스의 사상에도 잘 나타난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과 [도덕 감정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하는데, 이 '보이지 않는 손'은 하나님의 손'을 의미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가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정치, 경제, 사회를 본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작은 정부를 추구한다. 이는 정부가 국민을 최소의 필요만큼 통제하고 다스린다는 의미이다. 최소한의 통제를 통해 국민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한다. 여기서 자유민주주의의 개념이 도출된 것이다.


반면 인본주의 관점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호루스의 눈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는 '완성된 피라미드'를 추구한다. 모든 영역을 통제하기 위해 아주 치밀하고 체계적인 통제구조를 세우려고 한다. 이에 대한 예를 조지 오웰의 [1984]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기서 '빅브라더'는 카메라를 통해 모든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한다. 그리고 사람의 통제와 설계를 통해 완전한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적 정치관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런 통제를 위해 작은 정부가 아닌 큰 정부를 요구한다.


큰 정부는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의식주의 모든 문제를 다 책임지려고 한다. 마치 정부가 국민의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런 정부의 행동에 대해 벤 샤피로는 "정치는 행복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틀을 만드는 작업이지, 그 자체로 행복의 근원은 아니다"라고 적절히 지적했다.


아울러 토마스 제퍼슨은 "정부가 우리에게 행복을 부여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한 말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국가가 국민의 모든 문제를 책임질 때 삶이 평안해질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국가가 국민의 모든 문제를 책임진다는 것은 국민의 모든 영역을 통제하고 제한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직업을 책임진다는 것은 직업을 통제한다는 것이고, 먹을 것을 책임진다는 것은 먹는 것을 얼마든지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집단이 북한이다. 북한은 국민의 의식주를 책임진다. 그러나 책임만 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국민 통제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이렇게 국민의 국가 의존도가 높을수록 국민은 그만큼 국가의 노예가 된다.


3. 큰 정부의 목적: 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국민 개량

큰 정부에 대해 무엇보다 주의할 사항은 '사람이 완벽해질 수 있다'는 위험한 생각과 거기에 따른 '사회 개량론'이다. 이런 생각은 결국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으로 귀결되는데, 큰 정부의 기준에 미달되는 사람은 '그 사람을 개량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그래서 큰 정부가 제시하는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동조하지 않는 자들을 개량하기 위한 사회적 체계를 수립하게 된다.


오웰의 [1984]에는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거나, 정부가 요구하는 바에 대해 거부감을 품는 사람을 위한 수용소가 등장한다. 실제로 작금의 공산주의 국가를 보면 어느 나라나 수용소가 있다. 과거의 소련이나 중국, 북한도 마찬가지이다. 수용소는 유토피아 건설을 위해 개량이 필요한 사람들을 집어넣어 개조하는 시설이다. 거기서 끊임없는 고문, 강압, 세뇌의 작업이 자행된다. 이런 개조 작업을 통해 정부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유토피아에 적합한 사람'으로 사람을 개조한다.


북한의 경우는 개조가 잘 안 될 경우, 그들의 자유를 최대한 속박할 수 있도록 '5호 담당제'를 실시한다. 이는 1인당 5명씩 감시 관리하는 제도이다. 이것은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온 빅 브라더의 감시 카메라처럼, 사람을 통해 통제하는 것이다. 가족이 서로 감시하고 이웃이 서로 감시하는 그물망 구조로 모든 사람을 개량하면 완벽한 유토피아 사회 건설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항상 디스토피아(DISTOPIA) 일 뿐이다.


4. 큰 정부가 주는 혜택인가? 작은 정부가 주는 자유인가?

오늘날 국가가 계속 사회복지를 확충할 때, 이는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다. 사회복지가 자꾸 늘어나면 국민의 국가 의존도는 높아진다. 국가 의존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국가의 노예가 되는 자유의 제약을 초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국민이 국가에게 먹는 것을 의존한다면, 국가는 먹는 것으로 사람들의 자유를 통제할 권한을 갖게 된다.


상당수 사람들은 순진하게도 국가가 국민의 복지와 행복을 책임짊으로 국민의 부모역할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했던 사람이 바로 장자크 루소이다. 그는 자신의 저작 [사회계약론]의 서두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국가는 백성들의 아버지 역할을 해야 된다. 국가는 국민의 모든 가난과 헐벗음과 부족함을 채워주는 역할을 해야 된다. 그러지 못한 국가는 무능한 국가이다"


이 말은 언뜻 상당히 옳은 말같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 루소는 본래 일하기 싫어하는 성향을 가졌고, 자신의 인생도 상당히 무책임하게 살았다. 그는 슬하에 세명의 자식이 있었지만, 그들을 부양하지 않고 고아원에 보냈다. 그뿐 아니라 자신도 일하기 싫어서 당시 돈 많은 과부, 바랑스의 애인으로 살면서 풍요를 누렸다. 그리고 그 책임을 국가 탓으로 돌린 것이다. 자신의 무책임을 국가의 무책임으로 책임전가를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무책임한 개념이 프랑스 혁명의 기초가 되었고,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끼쳤으며, 결국은 공산주의 이념의 토대를 이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국가를 바라보면서

편안함과 게으름을 추구하면서 국가가 행복을 보장해 줄 것을 바랄 것이지

아니면 어렵더라도 부지런히 노력하며 자유와 행복을 스스로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할 것이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 질문에 올바로 답하려면 국민의 의식 수준이 높아야 한다. 그리고 이 의식 수준을 높이는데 교회가 주된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세워지는 방식이다. 그렇게 때문에 어느 시대에서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국가는 국민의 국가 의존도를 높이고, 국민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국민 의식을 최대한 낮추기 위해, 교회를 탄압해 왔다.


결론적으로 정치를 바라보는 전제, 곧 우리가 기억할 전제로서의 답을 얻기 위한 질문은 총 세 가지이다.


첫째는 "누가 주권자인가?"

이에 대한 답으로 하나님과 사람,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기독교와 인본주의 정치관으로 나뉜다.


둘째로 "누가 통치의 주체인가"

이 질문 역시 하나님의 법과 사람의 자율 중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갈라진다.


마지막으로 "사람과 국가는 완전해질 수 있는가?"이다.

이에 대해서도 유토피아를 꿈꾸며 큰 정부를 원한다면 '인본주의적 정치관'이고, 사람의 불완전함과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면서, 국민에게 최소한의 권력을 행사하는 정부를 주장한다면 '기독교적 정치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란스러운 이 시대 속에서 정치를 바라보는 이 세 가지 전제를 명확히 구분하고, 기독교적 정치관을 확고히 다져야 할 시대적 사명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은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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