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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 11(기독교 정치관의 두 번째 전제)

김민호 저 "기독교 세계관"

by 김해경

성경은 통치의 주체를 하나님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분의 형상대로 만드셨고,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 대리자로 이 세상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 실현해야 한다. 여기서 통치영역은 단순히 종교적인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가정, 사회, 국가 등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1. 종교개혁자들의 직업관: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라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 직업은 단지 생계유지나 부유함의 수단이 아니었다. 직업은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기 위해 주어진 사명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정치가라는 직업의 소명도 결국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기 위함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만약 어떤 영역은 하나님의 통치 구현을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정치의 영역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일관성을 상실한 모순임에 틀림없다.


2. 정치가는 하나님의 법으로 그분의 통치를 실현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통치 대리자로서 정치가는 국가의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미국 헌법의 기초를 만든 윌리엄 블랙스톤은 "모든 인간의 법은 두 가지 토대들, 자연의 법과 계시의 법에 의존한다. 즉 이 두 가지를 부정하기 위해 사람의 법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자연의 법은 하나님의 일반 계시를 뜻하고, 계시는 특별 계시인 성경이다. 즉 "하나님의 법이 국가의 모든 법 조항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가 블랙스톤이 내린 답이다.


실제로 자유주의적 이념에 기초한 미국의 헌법이 이를 반영했고, 이것이 우리나라에도 도입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적 정치의 전제는 하나님께서 통치의 주체가 되시며, 그분께서 사람을 통치 대리자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법, 곧 성경으로 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사실이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법인 자연(일반계시)과 계시(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는 대리 통치자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법을 통해 세상을 다스린다는 이해에서 자연스럽게 법치주의라는 개념이 나온 것이다.


3.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뉴잉글랜드에 도착한 청교도들이 법을 만들 때, 가장 먼저 관심을 가졌던 것이 신앙의 자유이다. 그들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국가가 세워지길 원했다. 거기서 나온 것이 정교분리이다.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어야 하는데, 이 분리는 교회가 국가에 관심을 끊으라는 뜻이 아니다. 국가가 교회의 신앙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에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의회는 국교 수립에 관한 법률이나 종교의 자유로운 향유를 금하는 어떤 법률도 제정할 수 없다. "


이 의미를 간략하게 해설하면, 국가가 교회를 규정해서는 안 되고, 또 특정 종교를 지지하거나 국가 종교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교분리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정치에 대한 교회의 무관심이 정교분리의 원칙이라는 주장은 엄연히 잘못된 것이다. 만일 교회가 정치에 관심을 끊어버리면, 결국 정치의 영역은 타 종교나, 이단, 무신론자의 몫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해 교회는 교회에 적대적인 다른 종교인들이나 무신론자들의 통치를 받게 될 것이 자명하게 된다.


한 예로 이슬람이 어떤 나라를 이슬람화시키는 작업을 할 때, 그들은 사람의 숫자로 이를 규정하지 않는다. 도리어 국가의 정치 장악의 여부로 규정한다. 정치만 장악하면 그들에게 무슬림의 많고 적음은 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이슬람이 우리나라의 정치를 장악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무슬림 정치가가 정한 샤리아법을 따라야 하며, 교회가 샤리아법을 거부하면, 이슬람 국가들에게서 나타나는 끔찍한 순교를 감수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무관심한 것이 적절한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도리어 정치적 무관심과 게으름은 하나님의 진노가 교회에 쏟아지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청교도들은 "언덕 위의 도시" 곧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며

하나님의 통치가 온 나라에 가득해서

정의가 하수같이, 공법이 물같이 흐르는 국가를 원했다.


4. 인본주의에서 통치의 주체: 사람의 자율

인본주의자들에게 통치의 주체는 누구인가? 인본주의에서 통치의 주체는 각자가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율은 놀랍게도 독재자의 자율에 도달한다. 독재자가 통치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철학과 사고로 국가를 다스리고, 여기에 속한 모든 국민은 자유를 상실한다.


플라톤의 [국가]에는 철인정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독재자가 철학자가 되어 모든 사람은 철학자의 자율적 사고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인본주의적 사고이다. 반면 기독교는 하나님의 법, 곧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적이고, 그것만이 복종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앞서 말한 하나님의 법은 자연(일반계시)과 계시(성경)를 말한다.


인본주의는 '1인독재' 외에 '군중 독재'라는 통치를 채택하기도 한다. 이를 전체주의라고도 표현한다. 예를 들어 다수가 불법적인 A를 주장한다고 치자. 그러면 소수가 주장하는 B는 아무리 합법적이라 하더라도 다수의 주장에 짓밟힘을 받게 된다. 2008년 우리나라에 있었던 미국산 쇠고기 논란이 그 사례이다. 헌법과 무관하게 "미국산 쇠고기는 안 된다!"라고 다수가 외치자, 그것이 법처럼 되어 버렸다. 쉽게 말해 떼법의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면 법의 권위가 침해를 당하게 되고, 소수의 자유가 속박을 받는 상황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러므로 '1인 독재'나 '군중 독재', 둘 중 무엇이 되었든지, 국가의 법이 무시되고 사람의 자율적 판단이 법이 될 수 있다는 사고가 곧 인본주의적 사고이다. 그들은 "사람은 자율적 존재이므로 이 자율에 의해 모든 것을 다스려야 한다"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가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왕이 곧 법"이라는 개념이다. 이것은 과거 봉건 국가의 통치방식인데, 왕의 마음에 안 들면 그 자리에서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처형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떼법의 형태로 나타나면 인민재판이 된다. 실례로 북한은 김정은의 마음에 안 들면 고위 간부라도 총살을 당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개인의 자율로 법을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독재자를 법으로 규정하면, 그를 추종하는 사람은 그 법(독재자)에 의해 억압을 받게 된다. 그래서 개인의 자유는 사라지게 된다.


개인의 자유는 통치자도 복종할 수밖에 없는 법의 보호가 존재할 때, 그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다. 법이 절대화되지 않으면 개인의 자유는 결코 보장받을 수 없다. 그러나 '1인 독재'나 '군중 독재'는 독재자가 곧 법이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려면, 1인 독재자나 다수의 군중의 눈치를 보고 복종해야 한다. 이게 소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국가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5. 인본주의의 자율적 통치를 원하는 이유: 유토피아의 환상

그러면 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인본주의적 사고에서 비롯된 통치구조를 추구할까? 그 이유는 바로 유토피아 때문이다. 1인 독재나 군중독재는 항상 국민에게 유토피아를 약속한다. 그래서 유토피아에 미혹된 사람들은 독재자를 지지하며, 그들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허용한다.


군중 독재도 마찬가지이다. 다수가 추구하는 바의 유토피아를 보장한다고 믿으면, 법치가 무시되고 사회가 전복된다. 그러나 1인이든 군중이든, 독재자들이 보장하는 유토피아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독재자들은 항상 대중의 욕심을 지극하여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먼 미래를 약속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군중들은 매번 미혹된다.


대표적인 예로 오늘날의 베네수엘라와 그리스를 들 수 있다.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이미 최저임금을 3,500%나 인상하면서, 국민들로 하여금 유토피아의 환상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이런 정치 공약은 일종의 마약처럼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 그러나 이것으로 국민의 생활은 결코 부요해지지 않았다. 도리어 더 심각한 물가 급상승으로 돈은 휴지조각으로 취급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통치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대해 분명한 답을 내려야 한다.

하나님의 법인가?

아니면 사람의 자율인가?


둘 중 무엇으로 다스릴 때 국가를 더 부강하게 세울 수 있는가?

우리는 역사와 오늘날의 여러 사례를 통해 이에 대해 숙고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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