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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 10(기독교 정치관의 첫 번째 전제)

김민호 저 "기독교 세계관"

by 김해경

1.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중립적인 자세가 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계관에 중립이 존재하지 않듯, 그리스도인이 정치를 중립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대해 이런 모호한 태도를 견지하게 되면, 정치는 자동적으로 인본주의 관점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기울게 된다.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결국 정치를 세속적 관점으로만 바라보게 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정치의 영역에서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라는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정치에 관심을 가지되, 이에 대해 명확한 성경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


2. 정치의 의미: 바르게 다스린다.

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정치라는 용어를 정리해야 한다. 먼저 정치라는 단어는 한자로 '정사 정(政)에 '다스릴 치(治)'를 쓴다. 이 단어는 '바르게 다스리다'를 함의한다. 따라서 용어의 의미자체에 주목하면 "바른 다스림"은 꼭 국가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교회에서도 바른 다스림, 곧 정치가 필요하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가정에서도 필요하다. 이처럼 사람은 사회적 존재로서 어떤 영역에서나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사람들이 모이면 반드시 정치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정치라는 용어는 굉장히 세속적이고 악하게 이해되는 경향이 있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정치자체가 더럽고 부정한 게 아니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 더럽고 부정할 뿐이다.


사람들이 올바르게 정치를 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국가의 영역에서 정치가 올바르면 올바른 나라가 되고, 악하면 악한 나라가 된다. 바른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런 책임감과 의무감이 없다면, 국가에 악한 통치가 이루어질 수 있음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3. 영역주권: 모든 영역이 주의 것이다.

교회 영역만이 하나님의 것이고, 나머지 영역이 모두 사탄의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이 다 하나님의 소유이며, 그분이 주인이시다. 이 개념을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영역 주권"이라 부른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만물의 주인이기 때문에, 국가, 가정, 학교, 직장, 교회 등 모든 영역에서 믿음의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야만 한다. 영역주권을 주장한 아브라함 카이퍼의 말과 같이 "사람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것이다'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한 치도 없다."


4.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그 영역을 사탄에게 내어주는 것이다.

비록 인류는 아담 안에서 범죄하고 타락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영역을 넘어 모든 영역이 다 회복되기를 원하신다. 성경의 가르침은 결국 만물의 회복이다. 하나님께서는 곧 모든 영역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교회를 사용하신다.


교회는 국가 정치의 영역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단순한 무관심은 사실상 그 영역을 사단에게 내어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더욱이 국가는 다른 영역보다 사회 전반의 모든 문제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임을 기억해야 한다. 에드먼드 버크가 말했듯이 국가의 정치는 사람의 도덕성과 직결된다. 국가의 정치에 무관심한 태도는 결과적으로 사회의 도덕성이 비성경적으로 추락하게 만든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5. 청교도의 정치관: 사회의 성화와 신앙의 자유

종교개혁 이후 그리스도인의 정치 참여에 대한 시각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눠진다. 먼저 청교도의 경우는 이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미국에서 청교도 연구로 저명한 하버드 대학교의 페리 밀러는 청교도 운동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는 개인의 성화이고

둘째는 '언덕 위의 도시를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곧 사회의 성화이다.


이 두 가지는 각각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청교도들은 개인의 성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게 사회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어떻게 사회를 성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들은 이러한 두 가지 성화가 갖는 밀접한 관련성을 일찍이 알았기 때문에, 함께 생각하며 이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청교도의 적극적인 정치관은 뉴잉글랜드로 이주한 비국교도에게서도 발견된다. 1620년 미국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이주했던 이유는 영국 국교회의 박해 때문이었다. 본래 그들은 개인적인 경건과 신앙생활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교회로부터의 핍박을 겪으면서, 정치에 무관심할 때 박해를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영국에서 "우리가 요구한 대로 종교생활, 즉 신앙생활을 해라"라고 강압했지만, 청교도들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우리는 성경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라고 반박했다.


이는 국가에 저항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그저 성경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국가는 이를 용납하지 않고 박해를 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하는 수 없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이주하게 된 것이다. 이들이 이런 이유로 이주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연히 신앙의 자유, 곧 정치에 큰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이주한 후에 흥미로운 현상이 하나 나타났는데, 그것은 선거 설교이다. 청교도의 선거 설교는 특정 후보를 뽑으라는 내용이 아니라, 선한 통치자의 자질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후보에게 투표해야 하며,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한 번의 선거로 인해 자신의 신앙의 자유가 뺏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했다. 이 인식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조금이라도 늦기 전에 회복해야 할 부분이다. 늦으면 영국의 청교도처럼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6. 칼빈의 정치관: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종교개혁자 칼빈은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롬 13:1)"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인이 국가에 관심을 가지고 이 영역을 하나님의 뜻대로 성화시켜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칼빈 이후의 개혁파 신학자들도 정치가 성화될 때, 그리스도인을 넘어 불신자의 도덕성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고려하여 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주장했다.


칼빈의 정치관을 이해하기 전에 우리는 전체주의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체주의를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키워드는 "행복"이다. 행복이라는 키워드는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는 요소이다. 이 철학적 관점에서 나온 정치관이 바로 전체주의이다. 중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전체주의 정부는 행복과 공공의 안전을 위해 국민의 자유와 권리와 재산 더 나아가 생명까지도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국가가 만일 우리의 공공 안전과 행복을 위해 자유와 생명과 재산에 해를 끼친다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칼빈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불법한 정부의 통치에도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칼빈의 다른 주장을 들어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그러나 주 안에서만 그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만일 그들의 명령이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이라면 그 명령을 존중하지 말라. 이럴 때에는 집권자가 가진 위엄에 조금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칼빈의 주장을 토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정권이 부당한 명령을 강제할 때 정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름으로 애매히 고난 받는 방식으로 고난이 우리의 삶에 나타나야 한다. 악한 정권의 명령을 거역함으로 우리는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명령을 따르는 것이 되며, 그 권력으로 인한 박해를 순순히 받음으로 악한 권력이라도 복종하라는 명령에 또한 따르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만일 악한 정권에 타협하여 고난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합법을 가장하여 하나님께 범죄 하는 것이며, 이는 더 큰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쌓게 된다.


그러므로 칼빈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하늘의 사자인 베드로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는 칙령을 선포했으므로 우리는 경건을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고통을 받는 편이 주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받도록 하자."


예를 들어 공공의 안전을 명분으로 대면 예배를 금지시키고, 백신 패스를 강제한 이것은 공공의 안전이라는 명목하에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재산과 생명을 위협하며 법치를 강요한 것이다 이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정으로 집권자는 온 노력을 경주하여 어떤 면에서든 자유가 감소되는 것을 막고 자유가 침해받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유의 수호자로 임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각성과 주의가 충분하지 못하다면 그들은 직책에 대해 불충실하게 되며 조국의 반역자가 된다(기독교강요 4권 20.8)"


7. 재세례파의 정치관: 국가와 교회의 단절

반면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재세례파는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그들은 초대교회로 완전히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경에 따르면 초대교회는 국가의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고, 그저 국가로부터 박해만 당할 뿐이었다.

"우리가 국가의 정치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국가의 정치는 마귀의 영역이다. 정치는 항상 교회를 공격했다!"라고 주장하면서 국가와 교회의 완전한 단절을 주장했다.


8. 인본주의의 유물론적 정치관: 우연적 진화를 통한 발전

인본주의의 전제는 기독교와 정반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관점에서 정치를 바라보지만, 인본주의자들은 우연과 진화의 주권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신론자이기 때문에 신의 빈자리를 우연과 진화로 채우는 것이다. 그들은 정치가 우연적인 진화에 의해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하자면 유물론적 계급투쟁이라고 한다. 계급투쟁을 일으켜서 투쟁에 의한 우연의 결과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면 정치가 자연히 진화될 것으로 그들은 본다.


인본주의자들은 사람을 낙관적인 시선으로 보고, 인간의 정(正)과 반( 半)의 갈등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얻어낼 수 있고, 그렇게 역사가 진행되고 정치가 진보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은 혁명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혁명으로 피를 흘려도, 정치과 역사는 결국 갈등의 끝에 진화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물론적 역사관이다.


9. 기독교와 인본주의: 개인인가? 전체인가?

기독교가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개인에게 큰 가치를 둔다. 이렇게 각 개인에게 큰 가치를 둘 때 여기서 인권이라는 개념이 가능하게 된다. 반면 과거 봉건 군주시대처럼 개인을 전체의 부속품 정도로 여기던 시대에는 인권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고, 개인보다는 전체의 안전과 존속이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군주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국가 통치에 위해가 된다면, 피지배계층의 사람은 얼마든지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되었다.


인본주의는 개인보다 항상 전체를 앞세운다. 그래서 그들은 다수의 안전과 행복과 평화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벤담의 공리주의가 여기에 속한다. 사실 북한이나 중국의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전체, 곧 체제의 수호를 위해 수많은 개인들의 죽음을 하찮게 여긴다. 그들에게는 전체가 중요하지 개인은 중요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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