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Geary st, 2015
필자에게는 16살 연상의 누님이 있습니다. 아마 5살 때로 기억하는데, 도시에 살던 누님이 추석에 집에 왔습니다. 누님이 들고 온 가방에는 '영국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그 가방 안에는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사진'이 있는 얇은 책자가 있었습니다.
당시 산에서 자주 놀았는데, 산 능선에 올라서면 첩첩이 펼쳐진 산세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곤 했습니다. 그 풍경 속에서 생각하는 것은, '저 산 너머에는 도시가 있을까? 자동차도 있겠지?' 하면서 혼자 많은 상상들을 했습니다. 라디오 방송에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자주 들을 수 있었어서 한국 말고도 많은 나라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들 중에서 우리나라는 아주 가난한 나라라고, 그래서 '새마을 운동을 열씨미 해서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는 말들을 자주 들었습니다. 미국처럼 '잘 사는 나라에 가는 길'도 많이 상상했습니다. 그 상상의 수준이야 당연히 걸어서 가거나 차를 타고 가는 정도였지만, 그때 이미 여행자가 되어 있었고, 11살 이후로 떠돌이 인생이 지속되었습니다. 때문에 태어난 고향에 어떤 애착 같은 것은 별로 없고, 고향마저 간혹 들르거나 잠시 머물다 가는 한 경유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갔습니다. 기회가 될 때마다 Golden Gate Bridge 주변을 산책하며, 어렸을 때 본, 흐리지만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그 금문교 사진의 촬영지'를 찾아 걸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아니지만 비슷한 곳을 찾았고, 그때 밀려온 감동을 말로 표현할 수 있었다면 분명 미술가보다는 시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일로 되새겨 본 것은, '마음에 꿈을 가지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가졌던 '금문교를 보고 싶다는 버킷리스트'는 30여 년이 지나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당시 꿈꿨던 세 가지는, 여행자, 미술가, 비행기 조종사가 되는 것이었고, 그중 둘은 성취했는데 파일럿은 시력이 나빠 포기했습니다. 그래도 크고 작은 비행기를 많이 타 봤고, 스카이 점프도 해 봤으니까 큰 아쉬움 없이 조금의 미련만 남아 있습니다.
다만 지금 내게 있는 꿈을 살펴볼 때면, '꿈에 대한 믿음'이란 것이 많이 쇄했다는 것을 느끼는데, 그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행자를 비롯해 미술가가 되어 그 일상 속에서 여러 곳을 여행하며 '눈과 사진에 담는 풍경과 인상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은, 불행의 조건을 많이도 갖춘 인생에 있는 두 행복 중 하나입니다.
그런 삶이 이유가 되어 내가 해야 될 일이라고 믿는 것이 몇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그동안 공부해 온 것을 '글과 그림으로 정리'하는 것입니다. 글쓰기는 익숙지 않고 항상 어렵지만,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은 때때로 재미가 있습니다. 어쩌면 많은 이에게 내 이야기가 흥미롭지 않을 수 있지만, 분명 나 같은 이가 또 있을 것 같고, 그런 이가 아직 어리거나 젊다면 내 정리가 도움 될 것이라 믿어 봅니다.
샌프란시스코 기어리 스트리트의 언덕길, 2022
샌프란시스코 연작으로 '애매하고 난해한 3점 투시도'의 예들을 보입니다.
그 첫 번째인 이 그림에는, 원근 투시를 난해하게 하는 요소가 두 곳에 있습니다. 하나는 '수직 실선의 기울기가 모두 평행처럼 보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도로의 소실점'과 '건물의 소실점' 높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에 소실점이 몇 개 있는지 물어본다면, '직관으로 보는 이'는 1개라 답할 것이고, '살피는 이'는 2개라 대답할 것입니다. 몇몇 지인에게 확인도 해 봤습니다. 그러나 '원근법을 숙련한 사람'은 '3점 투시도 인지 아닌지 '수직 기울기'를 확인'해 볼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에서 화면 가장 가까이 있는 소실점을 찾아보라고 하면, 거의 모두 자신 있게 화면 우측을 대충 지목합니다. 그러나 '실선을 그려서 정확한 소실점 위치를 지정'하라고 주문하면, 선 몇 개 그어 보고는 '이 그림은 잘 못 그려졌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때문에, 아래 이어지는 분석을 살피기 전에, '언급한 두 세 질문'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을 먼저 가진다면 좀 더 유익하지 않을까 합니다.
투시도 분석
그림에 '관찰자 위치'를 잡아 봤습니다. '관찰자'를 내 뒷모습으로 그릴까 했는데, 뒤를 볼 수가 없어서 그냥 상상 인물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가 왼손에 연필을 들고 관측하는 것은 '눈 중심선'을 비롯한 '세로 실선의 기울기'입니다. 절대로 앞에 지나가는 여인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확인이 반드시 필요한 이가 있다면 그림 속 여자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서, '투시 실선의 기울기'와 '소실점'이 만들고 있는, 마치 규칙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애매한 변화'를 살펴봅니다.
답이 분명한 것부터 보면, 건물들의 세로 실선들의 기울기 관찰은 '수직선을 그려보면 눈이 인지하기 어려운 미세한 기울기까지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대략이나마 '눈 중심선 위치를 먼저 특정하는 것'입니다. 분명 틀리겠지만, 중심선이 있어야 '좁아지는 기울기 각'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으로 건물들의 세로 실선 기울기를 보면, '화면 좌측 가장자리의 건물 실선들'은 분명하게 기울어져 있습니다.
정리하면, 건물의 '우측면 소실점'은 화면에 아주 가까이 있어서 그 분명한 기울기를 눈이 제일 먼저 인식하고, 건물 좌측면의 실선 기울기는 기울어짐이 분명하지만, 모두 평행처럼 보여 소실점이 있는지 없는지 조금 애매합니다. 하지만, 창문 배열 좌-우측의 위-아래 폭을 비교해 보면 '좌측면 소실점이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실선이 평행처럼 보이는데, 정말 평행인지 기울기가 있는지를 '확인할 기준'이 마땅치 않던 '세로 실선 기울기'는 소개한 방법대로 '수직선을 그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추를 단 실'이나 '자' 같은 것을 사용할 수 있는데, 때문에 그림 속 관찰자가 '연필을 수직으로' 들고 있는 것입니다. 즉, 눈 중심선을 기준으로 화면 가장자리로 가면서 하나하나의 실선 기울기를 비교해 보면, 하늘로 점점 좁아지는 기울기 각이 확인되고, 곧 하늘 저 멀리 어딘가에 '3점 투시 소실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 그림은 '3점 투시도 그림'이란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풍경이나 그림을 볼 때 거의 자동적으로 '소실점을 찾는 소재'가 '도로'입니다. 그런데 도로의 소실점을 찾아 그 높이를 지평선으로 확정해 그리다 보면, '원근에 맞는 건물'의 '좌-우 실선 기울기'가 '지정된 소실점'을 향하지 않아서 어떻게 해도 투시법에 맞게 그릴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에는 '건물들의 좌-우 소실점' 높이를 다시 확인하게 되는데, 그러면 '도로의 소실점'과 다른 높이에 '건물 소실점'이 찍힌다는 것을 확인하고 멘붕이 됩니다. 이는 '지평선 높이가 둘이라는 말'인데, 그렇게 되면, '두 개의 지구가 이중으로 겹쳐있다'는 말이 됩니다. 즉 관찰된 두 소실점 높이 중, 어느 것이 맞는지 판단해 '바른 하나의 지구를 구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판단의 근거'를 모르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심하면 그림을 완성하지 못할 수도 있고, 완성해도 원리가 없는 그림'이 됩니다.
그 판단의 근거를 말하면, '지형은 울퉁불퉁 높고 낮은 변화'가 있기 때문에, 비탈진 곳에서는 '지평선을 눈으로 볼 수 없고, 지형물은 제 각각의 소실점 위치를 가집니다.' 즉 지형과 지형물은 '관찰자의 눈이 보는 공간 1점 투시도의 소실점'을 벗어난 경우, 다시 말해, '지평선 높이'와 상관없는 '개별 투시도'인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지형물인 도로의 소실점[연두색 실선]'은 '지평선 상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건물'은 사람의 활동 공간이므로 몇 층의 건물이든 그 '수평면은 지평면과 평행으로 건축'됩니다. 건축에서 바닥면의 '레벨 맞추기'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따라서 '건물이 가지는 소실점의 높이'는 '항상 지평선의 높이'에 있게 됩니다. 즉 이 그림에서 '맞는 소실점의 높이'는 '건물 좌 우에 있는 소실점[파란 실선이 모인 소실점]'입니다. 그를 기준으로 도로의 기울기를 과장하거나 줄일 수도 있고, 모든 투시 실선의 기울기를 맞추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