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락만 해주십시오"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믿던 나에게-

by 송은영

스물셋.
지나고 보니 참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다.
신대원 합격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남편과 함께 학생 부부가 되어 있었다.

그때의 나는 늘 결혼을 못할 거라 생각했다.
누구도 나 같은 사람을 인생의 동반자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며느리로 맞아줄 집은 더더욱 없을 것이라 여겼다.
나 하나쯤은 내가 감당할 수 있지만,
내가 짊어진 사연을 다른 누군가에게 안겨 준다는 것이
두렵고 미안했다.
아마 더 깊은 곳에서는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것 같다.


오랜 시간
나는 ‘나는 존재 자체가 민폐다’라는 왜곡된 믿음 속에 살았다.
그래서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더 많이 웃고, 더 밝게 행동하고, 더 잘해야만 했다.
일그러진 자아상을 붙들고 살던 나였기에
남편의 사랑조차 온전히 믿지 못했다.


남편과 사귀던 시절,
나는 “헤어지자”는 말을 마치 숨 쉬듯 내뱉었다.
신학생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외치던 사람이었지만
어릴 적 상처는 틈날 때마다 얼굴을 드러냈다.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면서도
정작 ‘나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래서 남편이 떠나기 전에
내가 먼저 등을 돌리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나를,
남편은 긴 인내로 붙잡아 주었다.


사실, 내가 그렇게 일찍 결혼을 선택한 이유는
남편을 사랑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원가족으로부터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감도 있었다.
그 집에서 버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스스로를 달래 보아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날 조건 없이 사랑해 주는 사람이 나타났고,
그의 부모님 역시 아무 선입견 없이 나를 맞아주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한다는 소식은
신학대학에 간다는 말보다 더 큰 파장이었다.

결혼은 하되,
결혼 준비는 내가 스스로 해야 했다.


신학교 시절,
나는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고,
아주 짧게 선배 언니와 부침개 장사도 하며
학교생활을 해 나갔다.
교육전도사를 나간 것도
한 달에 20만 원이라도 사례비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차비 포함
일주일 2만 원으로 버티던 날들.
반찬은 김치뿐이었다.
그렇게 한 달을 8만 원 정도 사용하고, 남은 돈을
부모님이 적금으로 넣어 두셨다고 하셨다.
결혼을 앞두고 그 적금을 찾아보려 했을 때,
그 돈은 이미 오래전에 부모님이 써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키워주신 은혜에 감사하다.”
늘 그렇게 말하던 나였지만,
그 순간의 당혹감과 서운함은
말로 다 하지 못했다.


나의 속사정을 잘 아신 시부모님은
제주에서 남원까지 직접 찾아오셨다.
양아빠는 솔직하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제 딸을 시집보낼 형편이 안 됩니다.
이 아이는 혼자 준비해야 합니다.
졸업하자마자 결혼이라니,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러자 시아버님이 조용히 답하셨다.

“그러시지요.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허락만 해주십시오.
이 아이가 믿음 하나만 가지고 와도 충분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허락만 해주십시오”라는 말은
내가 시부모님께 드려야 할 말이었다.
어쩌면 우리 부모님이 먼저 하셨어야 할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입양아였고,
배다른 형제가 넷이나 되는,
작지 않은 사연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가진 것 하나 없고,
내세울 가계도 하나 없는 그런 사람.
그런 나를 며느리로 맞이하면서도
시아버님은 오히려
마치 을의 자리에서 간절히 부탁하듯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허락만 해주십시오…….”

그 말씀에는
꾸밈도, 계산도, 조금의 거리도 없었다.
그 따뜻함 앞에서
내 안에 잔뜩 쌓여 있던 긴장이
서서히 풀려내리는 것을 느꼈다.



남편이 처음 “우리 사귀자”라고 말하던 날,
그 순간은 분명 달콤했는데
내 입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온 말은
“부모님이… 나 같은 사람을 받아주시겠어?”였다.


결혼 얘기도 아닌데

왜 그런 말이 먼저 나왔을까.
지금 돌아보면
나는 ‘결혼’이라는 울타리 앞에서만큼은
늘 불안이 먼저 앞섰던 사람 같았다.


평소엔 잘 웃고, 잘 지냈다.
하지만 누군가의 ‘가족’ 안으로 들어가는 일만은
어쩐지 쉽지 않았다.
가정이라는 이름이 붙는 순간
내 안의 오래된 상처들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그 무게 앞에서는
스스로를 자꾸 의심하게 되었고
“내가 받아들여질까?” 하는 불안이
금세 마음을 덮곤 했다.

남편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요즘 말로 하면
“그냥 나만 믿어.”
그런 태도였다.

곧 남편은 부모님께
내 사정들을 모두 솔직히 이야기했고
시부모님은 내게
직접 만나 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렇게 스물한 살,
대학교 3학년 때
나는 처음 제주로 내려갔다.

시부모님의 집 대문 앞에 섰을 때,
손끝이며 어깨며 마음까지
다 떨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 떨림이 들키지 않도록
나는 나도 모르게
더 상냥하고, 더 싹싹한 모습으로 굴었다.

좋은 아이로 보이고 싶은 마음,
거부당하지 않으려는 마음.
그 마음이
오랜 세월 몸에 밴 ‘생존 전략’이었다.


어머님은 돌집 부엌에서
선풍기 하나에 의지해
땀을 훔쳐가며
내게 줄 음식을 준비하고 계셨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친엄마를 처음 만나러 갔던 날이
문득 겹쳐 보였다.
같은 온도, 같은 손길,
같은 ‘환대’의 마음이었다.


그날 밤,
대형 모기장을 친 안방에서
나는 어머님과 함께 잠을 잤다.
낯선 집인데도
오랜만에 깊고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환대라는 것이
사람을 이렇게 누이게 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시아버님과 어머님은
해남에서 제주로 건너와
남의 밭일부터 시작해
돌집을 짓기까지
한평생 몸을 다해 살아오신 분들이었다.

정직했고, 선했고,
무엇보다
나를 어떤 조건도 없이 받아 주었다.
그분들을 만나고 나서야
양아빠도 마음을 놓으셨던 것 같다.


결혼 준비가 한창이던 어느 날,
친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남은 보험금 가운데
내 몫을 남겨 두었다며
천만 원이 든 통장을 내밀었다.

엄마가 하늘에서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은영아, 이제야 엄마 구실을 조금은 하는구나.

그때 다 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지금이라도 너에게 보내 본다.”


나는 그 돈으로

시어머니와 함께 살림을 장만했다.
그때 어머님은 조용히 말씀하셨다.


“나는 너를 며느리라고 생각 안 한다.
하늘로 먼저 간 우리 수경이 대신
네가 온 거라고 생각한다.
수경이가 살아 있었으면
시집갈 때 내가 해줬어야 할 일을
지금 너랑 하고 있는 거다.”

그 말은
그분의 진심이었다.
형님이 떠난 빈자리에
나는 은혜처럼 들어온 셈이었다.

그 마음은
그 이후로도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어머님은 늘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 고맙다.”
그 한마디를 남기곤 하셨다.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그분 안에는 늘 흘러넘쳤다.


살다 보면
“배경이 뭐가 중요하냐”라고 말하면서도
상처의 흔적은 불쑥 고개를 든다.
그런 나를 감싸 주고받아 준 건
하나님의 손길이었으리라 믿는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참 준비 없이,
참 무모하게 결혼을 했다.

결핍 많았던 어린 시절을 지나
이상만 커 버린 내가 꿈꾸던 가정은
너무 높았고,
나는 그 이상을 감당하기엔
아내로서도, 엄마로서도
참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부족한 나에게
‘받아들여짐’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주셨다.

나는 그렇게,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고 있었다.

월요일 연재
이전 14화〈그 시절 우리는 서로의 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