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처럼 앉는 법을 배우는 중입니다.

-십만 원을 쥐고 상담실 문을 두드리던 서른네 살의 나-

by 송은영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아주 많이 힘든 시기가 찾아온다.

누구도 그 시간을 피해 갈 수 없다.

나에게 그때는 서른네 살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정말, 이러다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힘들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마음이 올라왔다.

“상담을 받아야겠다.”

상담비는 1회기 10만 원이라고 했다.

교회를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도 바닥을 치고 있던 때였다.

한 시간 상담에 10만 원을 쓴다는 것은, 내 형편에서는 도저히 상상하기 어려운 사치였다.

그래도 너무 힘들었다.

나는 거의 한 달 동안 만 원, 이만 원을 아껴 모아 겨우 10만 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돈을 들고 상담소 문 앞에 섰다.

‘아마 다시는 못 올지도 모른다’는 조급함,

내 안에 겹겹이 쌓인 문제들을

단 한 시간 안에 다 꺼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나는 그날, 숨도 고르지 못한 채 내 이야기를 쏟아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 절박함이 너무 애처롭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그때의 마음을 너무 잘 알기에,

지금 나는 내 앞에 앉는 내담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환대하고, 더 넉넉하게 맞이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내 문제를 한 시간 만에 다 말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날 소장님은

조급해하는 나를 향해 서두르지 않았다.

내 말이 앞뒤 없이 쏟아져 나와도

중간에 자르지 않고, 끝까지 차분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내 형편과 처지를 충분히 이해해 주며,

경제적인 부담 없이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공동체를 소개해 주었다.

그 한 시간의 경험은,

훗날 내가 상담자로 앉았을 때

내담자를 대하는 기본 태도의 뿌리가 되었다.


나는 신학을 전공했고, 사모로 살았다.

인생의 해답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고 믿으며 살았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라”는 말이

참 불편했다.

‘상담은 인본주의의 최고봉 아닌가?’

‘나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라야 하는데, 그런 나를 사랑하라고?’

특히 “나를 사랑하라”는 문장은

나에게 오래 거북하고 불편했다.

기도할 때도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라는 표현이 오히려 편했다.


나는 하나님을 믿었다.

그리고 내 모든 생각의 중심은 늘 하나님이었다.

그분이 무엇을 기뻐하실지,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에만 온통 마음을 쏟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어디가 아픈지 살피는 일은

왠지 ‘죄를 짓는 일’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하나님을 꽤 많이 오해하며 살고 있었다.

그분과 천천히 화해하는 동안

조금씩 그 오해가 풀려 갔다.


어느 날, 하얀 블라우스를 사러 아웃렛에 갔다.

내가 생각한 적정 예산은 1만 원에서 1만 5천 원.

하지만 매장마다 옷들은

태연하게 3만 원, 4만 원의 가격표를 달고 서 있었다.

근사하게 서 있는 마네킹의 옷들은

차마 쳐다보지도 못하고

나는 매대 위에 엎어져 있는 옷들만 뒤적였다.


사이즈 찾기도 힘든 옷들 사이로

팔을 쑤셔 넣어 뒤적이다 보니

내 허리도, 내 마음도 같이 구부러져 가는 것만 같았다.

결국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아무것도 사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데

웃기면서도 서러운 기도가 튀어나왔다.

“하나님, 저도 엎어져 있는 옷 말고

서 있는 옷 입고 싶어요.

하루 종일 다리 아프게 돌아다녔는데

왜 저는 맨날 엎어진 옷만 뒤적이게 하세요…”


어둡고 텅 빈 예배당에서

엎어져 울고 있는 내 모습을

하나님은 어떤 눈빛으로 보고 계셨을까.


아이처럼 솔직하게 투정을 부리고 나니,

이상하게 그분과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상담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몇 해 동안 내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 마흔이 되어서야

마침내 용기를 내어 대학원 입학시험을 치렀다.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잠시 꿈이 손에 잡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 나는 등록을 하지 않았다.

학자금 대출을 받으면 다닐 수는 있었지만

그 큰돈을 나 자신에게 투자한다는 것이

도무지 허락되지 않았다.

등록 마지막 날,

끝내 수강료를 내지 못하고

나는 또 교회로 갔다.

그날도 여전히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듯 울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저… 등록 안 했어요.

그래도 붙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돼요.

떨어져서 못 간 건 아니니까요…”

억지 위로를 스스로에게 건네고 있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물으시는 것 같았다.

“은영아, 내가 너에게 누구니?”

“하나님이요, 제 아버지시죠.”

“내가 네 아버지가 맞니?”

“네.”

“그런데 왜 내게 구하지 않니?”

말문이 막혀 있는데

또 한 번 물으셨다.

“왜 딸처럼 굴지 않니?”

그 한 문장이

내 안에서 오래 얼어 있던 마음을 깨뜨렸다.

그날 나는 정말, 딸처럼 울었다.

결국 다음해에 다시시험을 치르고 합격을 했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때 문득, 둘째 아들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축구부에 들어가고 싶다며 울던 날.

한 달에 50만 원이 드는 훈련비.

아이도 우리 집 형편을 알 만큼 알고 있었던지,

오랫동안 혼자 끙끙 앓다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축구 너무 하고 싶어…”

그 아이에게 나는

내가 어릴 적 부모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을 해 주었다.


“찬우야, 축구해.

엄마 아빠가 어떻게든 도와줄게.

걱정 마. 해. 해도 돼.”

아들은 더 크게 울면서 말했다.

“아니야, 돈 없잖아.

어떻게 해…”


그때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아빠 돈 많아.

은행에 많아.

아빠가 안 찾아서 그렇지.”


속으로는

‘없는 돈으로 또 저러네…’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엉엉 우는 아이를 안아

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몇 달 뒤,

아들은 스스로 축구부를 그만두었다.

자기 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안다.

하고 싶었던 걸 한 번 해 보고 내려놓는 것과,

아예 해 보지도 못한 채

평생 미련을 품고 사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둘째는 학창 시절 내내

학교에서 사건 사고를 일으키는 일이 적지 않았다.

학교에 찾아가

선생님께 여러 번 고개를 숙이고 돌아온 날이면

나는 늘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다음 날이면 이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엄마, 밥 줘.” 하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속으로 말했다.

‘얘는 나를 엄마로 믿고 있구나.’

무슨 일을 해도

엄마인 나는 여전히

자신을 아들로 받아 줄 거라고

당연하게 믿고 있는 얼굴.

그 당당함이

나는 부러웠다.


나는 하나님께

그런 딸이고 싶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그분의 딸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 딸.

하지만 실제로 나는

하나님 앞에서 늘 긴장했다.

실수하지 않으려 애쓰고,

기도하려고 눈을 감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은혜가 아니라

“결격 사유가 많은 사람”이라는

나 자신에 대한 감각이었다.

그 생각이

기도 자리로 나아가는 발걸음을

점점 지치게 만들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마침내 이런 말이 터져 나왔다.


“하나님, 저 이제 질리시죠?

지겹죠?

매번 기도한다고 와서는

똑같은 레퍼토리로 징징대니까

이제 그만 좀 하라고 하고 싶으시죠?

저도 제가 지치는데

하나님은 오죽하시겠어요.

저는 정말 안 되나 봐요.

도무지 변하지 않네요.

이런 제가, 저는 너무 싫어요.”


기도라는 이름으로

나를 향해 비난을 퍼붓고 있을 때,

하나님은 조용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은영아, 나는 네가 왜 그러는지 알아.

네가 기억하는 너보다

더 많은 너를 나는 기억하고 있어.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네 모습까지도

나는 이해할 수 있어.

네 몸짓, 눈짓 하나까지

다 알고 있단다.

네가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나는 너무 잘 알아.

그래서 괜찮아.

네가 어떤 모습이어도

나는 지치지 않아.

지겹지도 않아.

은영아, 나는 사람이 아니잖니.

기억해, 나는 네 아버지란다.”


그날, 나는 알았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를 그렇게 변함없이,

한결같이 환대하고 계셨다는 것을.

지금도 나는

그분의 마음을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

다만 분명하게 아는 것은

하나님이 기꺼이

나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다는 사실,

그 아버지의 환대 안에서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을 조금씩

사랑하는 법을 배워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도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들을 맞이할 때,

나는 그때의 나를 떠올린다.


한 시간에 내 인생을 다 털어놓던

서른네 살의 절박한 내 모습을.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시 다짐한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맞으셨던 것처럼

이 사람을 환대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날 이후

나는 조금씩 배워 가고 있다

엎어져 있던 옷만

뒤적이던 사람에서

마네킹이 입은 옷을

한 번쯤

눈여겨보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부인하기에 앞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나를

천천히 바라보는 사람으로

그리고 오늘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들을

그분이 나를 맞으셨던 것처럼

끝까지

환대해 주고 싶은

한 사람으로

딸처럼 굴지 못하던 딸이

이제야 조금씩

딸처럼 앉아 있는 법을

배워 가고 있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