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하철에서 선글라스를 쓴다>

내가 나를 용서하자, 아빠의 얼굴이 달라졌다

by 송은영

나는 평소에 잘 운다.
특히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자주 운다.
아마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음악을 자주 들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조금 슬픈 음악이라도 들으면 더 금방 눈물이 차오른다.

그래서 나는 지하철을 탈 때 선글라스를 쓴다.
내 선글라스는 유독 크고 까맣다.
내가 울어도 사람들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한다.
물론 애초에 사람들이 나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겠지만,
그래도 마음 편히 울 수 있어서 좋다.


얼마 전, 지인들과의 약속이 있어 창덕궁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도
또 울음이 터졌다.
문득 돌아가신 양아빠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빠는 뇌경색으로 또 한 번 쓰러지셨고,
연세가 있으셔서인지 회복이 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을 누워 지내시다가 결국 돌아가셨다.

아빠를 모실 형편이 안 되었던 우리는
결국 아빠를 요양병원에 모실 수밖에 없었다.
아빠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아빠는 꿈속에 자주 찾아오셨다.
그토록 그리웠던 아빠였는데
꿈속에서 아빠의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무겁고 차가웠다.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도 나는 아빠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은혜도 모르는 것….”


공양미 삼백 석을 얻어 인당수에 몸을 던져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한 심청이가 되었어야 할 내가,
그렇게 아빠를 보낸 일은
오랜 시간 나를 죄책감 속에서 괴롭혔다.


결혼을 하고 두 아들을 키우면서
단 한 번도,
이 아이들이 크면 내가 고생한 것에 대한
어떤 대가를 기대해 본 적이 없다.
은혜를 갚으라고 요구해 본 적도 없다.

아이들이 존재해 준 것,
자라면서 내게 웃음을 지어 준 것,
서툴기 그지없는 엄마를 믿어 주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손을 붙잡아 준 것만으로도
이미 너무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양아빠에게
내가 진 빚을 다 갚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컸다.
그 죄책감이 한동안 꿈속에서 나를 시달리게 했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빠는 정말 그런 분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빠가 나를 꾸짖고 있던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못살게 굴고 야단치고 있었던 것에 가깝다.


내 기억 속의 나는,
내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꽤 이기적이고 사나운 캐릭터였다.
엄마 없이 자랐던 내 결핍을 들키기 싫어서였을까.
새엄마들에게 억압받고 눈치 보며 지내던 내가
전혀 다른 자리에서 그 쌓인 마음을 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부끄럽지만, 그랬다.


그런데 내가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나는 여러 가지로 기가 죽어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존재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것,
그냥 그대로 수용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렵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너무 싫지만, 그 감각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다.
지겹게 따라다니는 생각이다.

상담을 공부하고, 지금 상담자로 살아가면서

나는 그런 나를 조금씩 달래고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반장이 되었다.
아빠는 그 사실이 무척 기뻤던 모양이다.
어느 날, 막내 여동생의 손을 잡고 학교에 찾아오셨다.
반장 턱을 내주고 싶으셨던지
아이스크림을 한가득 사 오셨다.

하지만 그날 나는 아빠가 부끄러웠다.
다른 친구들의 아버지에 비해 훨씬 나이가 많았던 아빠,
게다가 손녀 같은 막내 여동생의 손을 잡고 나타난 그 모습이
사춘기였던 나에게는 영 못마땅했다.

친구들이 볼까 봐
나는 아빠를 급하게 내몰았다.


“아빠, 그냥 가세요. 얼른 가요.”

훗날, 힘없이 걸어가시던 아빠의 뒷모습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았다.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나를 이렇게 다독여 본다.


그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는
그럴 수도 있었을 거라고.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친구들의 눈빛이
얼마나 버거웠겠느냐고.

그러니, 그 장면만으로
너무 오래 자책하지 말라고.


내가 나를 조금씩 용서해 주었을 때
어느 순간부터 아빠는
더 이상 꿈속에 무서운 얼굴로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나를 품어 줄 때,
비로소 아빠의 얼굴도 달라졌다.


시어머님이
항암 치료를 받으실 때가 있었다.

집에서 모시고 지낸 시간이
꼬박 1년쯤 되었던 것 같다.

약 기운에 입맛을 잃으신 어머님께
어떻게든 맛있는 것을 먹여 드리고 싶어
매 끼니마다
밥과 반찬을 챙기는 일이
내 일상의 대부분이 되었다.

어느 날,
냉장고를 열어 이것저것 꺼내다 문득
아빠 생각이 났다.


“이게 뭐라고…
나는 아빠에게
내 손으로 밥 한 번 제대로 지어 드리지도 못했네.”


그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가족들이 눈치채지 않도록

수도꼭지를 세게 틀어 놓고,
그 물소리에 섞어
한참 동안 서러운 눈물을 삼켰다.


어머님을 위해
밥을 짓는 그 부엌에서조차
나는 아빠에게
때늦은 사과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신호등을 기다리며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그때 한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행색은 누추했고,
이발을 하신 지 오래된 듯
머리카락은 한참 자라 있었다.
옷은 계절에 맞지 않게 얇았고,
한 손은 굳어 있었으며
지팡이에 의지해 겨우 걸음을 옮기고 계셨다.

그 노인에게 횡단보도라는 거리는
유난히 더 멀게 느껴지는 길 같았다.

빨간불이 초록불로 바뀌고
사람들이 정신없이 바쁘게 걸어가는데,
문득 무슨 용기가 났는지
나는 그 할아버지와 발을 맞춰 걷기 시작했다.

큰길이라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는데
예상대로 횡단보도 중간에서
신호는 다시 빨간불로 바뀌어 버렸다.

할아버지는 마음은 급한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
무척 곤혹스러워 보였다.

그 순간,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일은
그저 함께 걷는 것뿐이었다.
그분이 느꼈을 곤혹스러움을
혼자 감당하지 않도록 곁에 서 있는 일.
그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고마운 것은,
차들 아무도 빵빵거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할아버지는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셨다.

그렇게 횡단보도를 다 건넌 뒤
나는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할아버지, 옷이 좀 추워 보이세요.
죄송하지만, 저희 집에 점퍼가 하나 있는데
혹시 드려도 될까요?”


할아버지는 집에 옷이 있는데
하필 오늘 지퍼가 잘 잠기지 않는 옷을 입고 나왔을 뿐이라며
괜찮다고 사양하셨다.
그리고는 몇 번이고 고맙다고 인사하며
다시 더딘 걸음으로 길을 건너가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돌아가신 아빠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나는 안다.
그날 내가 한 행동은
단순한 동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아빠도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한동안은 그 노인처럼
더딘 걸음으로 살아야 했던 시간이 있었다.

나는 그날,
아주 늦은 참회를 한 셈이었다.


아빠를 보내 드린 날은
이제 오래전 이야기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지하철 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다가
불쑥 아빠를 떠올리고,


부엌에서 밥을 짓다가
갑자기 수돗물을 세게 틀어 놓으며
몰래 눈물을 삼키기도 하고,


횡단보도 위에서
낯선 노인의 걸음 속에
아빠의 뒷모습을 겹쳐 보곤 한다.


아직도 나는
아빠에게 미안해하면서도,
그렇게까지 나를 몰아세우는 내가
한편으론 가엾게 느껴진다.


미안함과 연민이 뒤섞인 이 마음을 안고
밥을 짓고, 길을 건너고, 지하철을 탄다.
일상의 자잘한 몸짓들 속에서
나는 아빠에게도, 그때의 나에게도
조금씩 늦은 안부를 건네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하철에서 선글라스를 쓰고
스쳐가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또 눈물이 차오르면,

나는 그저
“그래, 아직도 사랑하는 거지.”
하고 혼잣말을 한 번 해 본다.

미안함과 연민이 뒤섞인 이 마음을
사랑이라고 불러 주는 연습,
오늘은 그 정도면
된 것 같다고 여겨 보기로 한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