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버지 사이에서, 지워두었던 이름과 다시 마주 앉기까지-
대학교 때 엄마가 천국으로 가신 뒤, 결혼을 준비하면서
나는 그래도 남편에게 친부를 한 번은 소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주 오랜 시간, 내게 아빠는 양아빠 한 사람뿐이었다. ‘양아빠’라는 호칭조차 어색하다.
내게 아빠는 그냥 아빠였다. 그 아빠와의 시간이 너무도 특별했기에, 친아빠에 대해서는 일부러 아무 감정도 만들지 않으려 했다. 아니, 감정이 생기지 않도록 내 깊은 무의식이 애써 눌러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친아빠를 남편에게 소개하던 자리 역시, 내게는 형식적인 통과의례에 가까웠다.
아빠는 결혼식장에도 오지 않았다. 아니, 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형식적인 왕래 정도만 하다가, 암투병을 하던 동생 미라가 천국으로 간 장례식장에서
나는 다시 친아빠를 보게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친아빠를 마음속에서 철저히 치워 두는 일을, 가장 그럴듯한 복수라고 여겼던 것 같다. 미움조차 남겨 두지 않은 채, ‘무(無)의 감정’ 속에 방치해 두는 것.
그래서 장례식장에서 아빠를 마주쳤을 때도 나는 대면대면했고, 몸과 마음 모두 차가웠다.
막내딸을 먼저 보낸 아빠는 술에 취한 채 나를 불러 세웠다.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낯선 친척들에게 처음 인사를 건네던 그날처럼,
이번에도 아빠는 둘러앉은 친척들을 하나씩 내게 소개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누군 줄 아냐? 나는 네 아빠다.”
아마도 내가 아빠대접을 하지 않는다고 느끼셨는지 그 섭섭함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다.
한동안 영화 속 “내가 네 아빠다”라는 대사가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거리처럼 소비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날 장례식장에서 아빠가 내게 건넨 그 한마디는,
삼십삼 년 동안 단단하게 봉인해 두었던 내 마음의 자물쇠를 단숨에 풀어 버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장례식장 밖으로 뛰쳐나온 나는 거의 짐승처럼 울었다. 어디서 그렇게 눈물이 솟아나는지,
내 안 깊은 밑바닥에서부터 서러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내게 무엇을 기대한 거지? 지금 나한테 뭘 바라며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이제 와서 내 아빠이고 싶었던 건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동생을 잃은 슬픔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왜 하필 그 순간에 그 말을 해야 했을까.
한참을 울고 있는데 외삼촌이 밖으로 나왔다.
“에고, 은영아… 어른들이 너한테 못할 짓을 했다.”
그 한마디에 나는 아이처럼 삼촌 품에 안겨 목 놓아 울었다.
우스운 건, 아빠는 아마 내가 그렇게 울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장례식장 안에 그대로 앉아 있었을 거라는 점이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야 알았다. 아빠는 뒤늦게라도 한 번쯤, 아버지 노릇을 해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남편이 부천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아빠는 안성에 살고 계셨다.
주일이면 한 시간 반을 운전해 예배를 드리러 오셨다. 신실한 믿음 때문이라기보다,
갓 개척한 교회에서 몇 안 되는 성도들과 예배드리는 딸을 위해 빈자리를 채워 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그렇게라도 힘이 되어 주고 싶으셨던 걸까.
그러나 내 입장은 달랐다.
나는 송은영이고, 아빠는 양귀호. 성도들 앞에서는 “아빠”라고 소개했지만,
양부와 친부, 입양의 사연을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었다.
이 복잡한 관계를 생각하면 모든 순간이 곤란하고 벅찼다.
어느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와 길을 걷다가 한 아주머니를 만났다.
“아니, 이게 누구야. 귀호 오라버니!”
그분은 반갑게 인사하며 자신을 아빠의 고향 후배라고 소개했다.
얼떨결에 우리는 아빠, 남편, 그리고 나까지 넷이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아주머니는 아빠에 얽힌 옛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위로 누나들이 여럿 있었고, 막내로 태어나자마자 친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것. 누나들 손에 애지중지 길러진 막내였고, 젊었을 때는 기타 치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 동네 아가씨들이 다 좋아하던 청년이었다는 것.
결국 그중 한 사람이 내 엄마, 윤영순이 되었다는 이야기.
아무리 봐도 그런 인기가 있었을까 싶어 잘 상상이 되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아빠를 많이 좋아했다는 말은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날 나는 아빠의 손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었다.
유난히 길쭉한 손가락 마디마디가 소름 끼치도록 나와 닮아 있었다.
‘내가 노래를 좋아하고, 제법 노래를 하는 것도 아빠를 닮아서였을까.’
거부해도 어쩔 수 없이 닮아 있는 것들이 분명 있었다.
나에게도, 아빠에게도 서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고, 아빠 역시 어디까지 다가가야 하는지 늘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살아갔다.
그러다 10여 년 전, 아빠가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하셨다.
심한 당뇨에, 심장이 안 좋으셨던 아빠는 어느 날부턴가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아
먹는 것 자체를 힘들어하셨다. 연세대병원에 입원해 계셨고,
영암이라는 머나먼 지방에 살던 언니는 자주 서울로 올라와 아빠를 돌봤다.
나는 비교적 가까이에 살고 있었기에 병문안을 빼기 어려웠다.
어느 날 병실에 갔을 때, 아빠는 같은 병실의 다른 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 딸이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잘 돌보는지 몰라.”
부러움이 잔뜩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그 순간, 내 안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던 분노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나는 이렇게 툭 내뱉고 말았다.
“그러니까, 좀 잘 사시지 그랬어요.”
아빠는 멋쩍게 웃으며 “아니, 그렇다고…” 하며 말을 흐리셨다.
나는 서둘러 병실을 나와 복도 끝에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아빠에게 차마 하지 못한 말들을 남편에게 그대로 쏟아냈다.
“도대체 뭘 기대하는 거야? 지금 내가 이렇게 와 주는 것만도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게 말이 돼?”
전화기를 쥔 손이 떨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는 또 한참을 울었다.
그제야 알았다.
나는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감각으로 봉인해 두었다고 믿었던 자리에는,
사실 무서울 만큼 진한 분노와 원망이 고여 있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 이렇게 변명하고 있었다.
‘나는 아는 척 안 할 거야. 모른 척할 거야.
나는 그래도 괜찮아.
그리고 그 사람은 그런 대접을 받아도 괜찮은 사람이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소용돌이를 애써 합리화시키며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냉담하게 아빠를 대하고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빠가 조영제를 먹고 CT 검사를 받다가 검사 도중
조영제가 기도를 막아서 의식불명이 되셨다는 소식이었다.
아빠는 일주일 정도를 버티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셨다.
의료사고 문제로 소송을 준비하느라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빠를 보내는 과정 또한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에도, 아빠가 남겨 놓은 일들을 정리하느라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던 사채빚을 막기 위해,
언니와 나는 여기저기 은행과 사무실을 전전하며 급하게 이자를 갚아야 했다.
아빠 집을 정리하는 일도 서둘러 마무리해야 했다.
아빠의 입관식 자리에서야 나는 비로소 아빠에게 말을 건넬 수 있었다.
“아빠, 이렇게 가는 건 아니잖아요.
이건 좀 아니잖아요. 나, 아직 못다 한 말이 있는데….
아직 못다 한 말이 너무 많은데….”
원망이 섞인 말이었지만, 그 말속에는 아빠와의 마지막 기억이
‘매정한 딸’로만 남아 있는 것이 견디기 힘들다는 마음이 함께 들어 있었다.
엄마, 미라, 그리고 아빠.
이렇게 세 번의 장례를 치르면서 나는 비로소 친척들의 얼굴을 하나둘 알아보게 되었다.
아빠 장례식장에는 한 지인이 화환을 보내 주었다.
그분은 나를 ‘송은영’으로 알고 있었기에,
상주 이름표 어디를 보아도 내 이름이 보이지 않자 한참을 헤맸다.
그제야 알았다. 상주 명단에 적힌 이름이 ‘송은영’이 아니라 ‘양은영’이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활자로 쓰인 ‘양은영’이라는 이름을 눈으로 확인했다.
참 낯설고, 참 어색한 이름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언니는 울먹이며 말했다.
“다들 가네… 엄마도, 미라도, 아빠도…. 왜 다 이렇게 떠나가…”
내가 맞이하는 이별과 언니가 맞이하는 이별은 분명 온도차가 있었을 것이다.
이별이라는 것은, 준비된 이별이든 갑작스러운 이별이든,
슬픔의 결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나면 언제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움은 더 깊어지고, 후회는 더 자주 밀려온다.
“마음이 너무 고달프다.”
늦은 밤, 언니에게서 온 짧은 문자 한 줄이 유난히 차갑게 가슴에 박혔다.
돌아보면, 내 인생 어느 순간도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그럼에도 이별 앞에 서면 늘 대책이 없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조금 덜 두렵고, 조금 덜 눈치를 보게 되고, 조금 덜 참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슬픔만큼은 여전히 어쩔 수가 없다.
아빠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라며 넉넉하게 이해해 주면서도,
유독 아빠에게만큼은 끝내 그 말을 건네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나는 너무 쉽게, 너무 빨리 용서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내게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에서 조용히 아빠에게 말했다.
“아빠, 이제 아빠를 용서해요.
아빠의 인생에 ‘은영’이라는 딸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세요.
그리고 저도 제 인생에,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또 한분이 계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마지막에 제가 던졌던 차가운 말들도…
언젠가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었던 늦은 응석이고, 서툰 투정이었다고 여겨 주실 수 있을까요.
부디, 거기서는 조금 더 편안하시기를….”
나는 여전히, 장례식장 복도에서 처음 마주한 그 이름을 기억한다.
‘송은영’이 아닌, 낯설고도 낯익은 이름.
장례식장에서 마주한 이름, ‘양은영’.
그 이름 앞에서야 비로소, 나는 나와 아빠 사이에 남겨진 긴 시간을 천천히 바라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