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미화하던 엄마가 가난이 싫다고 말하기까지-
내 내담자 중 초등학교 6학년 남자아이, 내가 ‘짱구’라고 부르던 친구가 있다.
어느 날 소원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붕어빵 천 원어치를… 한 번만 나 혼자 다 먹어 보고 싶어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요즘 세상에, 그것도 서울에서, 초등학생의 소원이 붕어빵 천 원어치를 혼자 먹어보는 것이라니.
우리는 겨울바람을 맞으며 함께 밖으로 나가 붕어빵을 사 먹었다.
믿기지 않지만, 지금도 이런 소원을 품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이제 스물여섯이 된 둘째 아들과 아파트 주변을 걷다가 짱구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 나도 6학년 때 그랬어.
친구들이 떡볶이 사 먹을 때, 나도 먹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그 앞에서 그냥 쳐다보고만 있을 때가 많았어.
나도 그랬다고….”
순간 나는 걸음을 멈췄다.
아들에게 겨우 한마디를 건넸다.
“그랬구나… 엄마가 오래전 일이라고 잊고 있었네.
우리도 그렇게 힘든 시절이 있었지. 미안하다, 아들.”
돌아보면, 나는 내가 살아낸 시간 속에서
함께 그 시절을 견뎌 온 아이들이 느꼈을 결핍을
다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가 자기의 가난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하면서,
내담자의 이야기에는 안타까움을 쏟아내는 모습을 보는 일이
아들에게는 서운하고도 불편했을 것이다.
아들을 먼저 집에 들여보내고 혼자 천천히 걸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오래전 장면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각오하고 들어선 길이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가난한 전도사의 아내로 살겠다 마음먹었을 때,
나는 그 삶을 크게 불평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남편과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이들은 달랐을 것이다.
하나님께 인생을 헌신하기로 결단한 건 우리 둘이었지,
아이들은 아니었으니까.
순천에서 남편이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때,
우리가 섬기던 교회가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사택과의 거리가 멀어졌다.
어느 날, 갑자기 교회에 가야 할 일이 생겼는데
아이들을 챙기다 보니 교회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일반버스를 타면 약속시간에 크게 늦을 상황이었다.
남편은 이미 교회에 가 있었고,
나는 두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든 교회에 가야 했다.
급한 마음에 택시를 잡아 세웠다.
그때 내 지갑 속 현금은 3,500원이 전부였다.
“기사님, 죄송한데요… 3,500원어치만 태워 주실 수 있을까요?”
일단 가는 데까지 가 보고,
거기서 내려 버스를 타든 걸어가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그것뿐이었다.
지금 내가 “조금 여유가 생겼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다면,
가끔 택시를 탈 때다.
예전에는 어쩔 수 없이 급한 일이 생겨 택시를 타면,
미터기가 올라가는 숫자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창밖 풍경을 보며 갈 수 있다.
그 변화를 나는 꽤 큰 변화로 받아들이고 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느 시기,
우리는 결국 교회를 개척했다.
여수에서 부교역자로 지낼 때는
피아노 학원과 검도 학원을 다닐 수 있었다.
넉넉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아이들 학원비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개척을 하고 나서는
그마저도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얘들아, 당분간은 예전처럼 학원 다니기가 어렵겠다.
엄마가 미안해.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겠니?”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교회에 반주자가 없어 오래된 반주기에 맞춰
찬양하는 모습을 보던 초등학교 5학년이던 큰아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엄마, 내가 피아노 쳐 볼까?”
그 말이 참 기특하고도 안쓰러웠다.
하지만 그러려면 다시 학원을 다녀야 했다.
우리 사정을 알게 된 한 사모님이
큰아이의 피아노 학원비를 도와주겠다며 손을 내밀어 주셨다.
그렇게 학원을 알아보던 중
우리가 가게 된 피아노 학원 원장님이
목회자 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했던가.
원장님은 아마 자신의 어린 시절이 겹쳐 보였던 모양이다.
“십만 원만 내고, 두 아이 다 보내세요.”
원장님의 그 한마디는
우리 집에 작지만 분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이 되어 주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피아노 학원 위층에는 해동검도 학원이 있었다.
예전에 여수에서 두 아들이 다니던 바로 그 학원이었다.
어느 날부터 둘째가
피아노 학원에 갈 때마다 여수에서 입던 검도복을 다시 꺼내 입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이랬다.
피아노 수업이 끝나면 둘째는
3층 검도 학원 앞에서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서 있었다고 한다.
관장님은 원생도 아닌 아이가 검도복을 입고
매일같이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신기해
어느 날 아이를 불러 물어보셨다고 했다.
“너 누구냐?”
“해동! 저는 박찬우고요, 지금 3학년이에요.
예전에 해동검도를 했는데,
지금은 집 사정 때문에 못 다녀요.
조금 있으면 다시 다니게 될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 당찬 대답이 관장님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 같았다.
관장님은 아래층 피아노 원장님께 우리 사정을 더 들으신 뒤,
이렇게 말씀을 전해 주셨다.
“형편이 되실 때 학원비를 내셔도 됩니다.
지금은 그냥 보내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이가 검도복을 입고 서성였을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십만 원은 꼭 드리고 보내야겠다고.
관장님 역시 피아노 학원과 마찬가지로
그 십만 원으로 두 아이를 함께 가르쳐 주셨다.
그때의 경험은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감각을
가난 속에서도 잃지 않게 해 주었다.
언젠가 다른 방식으로
이 사회에 빚을 갚아야 한다는 마음을
아이들 역시 몸으로 배우고 기억하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내 삶뿐 아니라
아이들의 인생에도
섬세하게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구체적으로 느끼게 해 준 사건이기도 했다.
물론, 그런 감동과 감사가
항상 그대로 유지되기만 하지는 않는다.
큰아들이 네 살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초여름이라 동네 사람들이 평상에 둘러앉아 수박을 먹고 있었다.
아이와 함께 길을 걷던 중
큰 아이가 내 옆에서 이렇게 물었다.
“엄마, 우리도 완전 여름 되면
수박 많이 나올 때 되면
그때 수박 사 줄 거죠?
지금은 아직 완전 여름 아니니까 안 되고,
정말 더운 여름 되면 먹을 거죠?”
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는데,
아마 남편과 마트에서 수박 가격을 보며 했던 말들을
아이 나름대로 마음에 새겨 둔 것 같았다.
“아직 제철이 아니라서 좀 더 있으면 싸질 거야.
지금은 초여름이라 너무 비싸.”
어른들끼리 무심코 나누던 대화였다.
아이에게는 “조금만 더 참으면 수박을 먹을 수 있다”는
희망 섞인 약속으로 들렸던 모양이다.
확신에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그때의 아이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었을 때,
또 다른 상징 같은 일이 있었다.
그 시절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브랜드가 있었다.
세상의 유행을 다 따라가는 것이
언제나 옳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사춘기 아이들 마음속에
‘나도 한 번쯤 그런 옷을 입어 보고 싶다’는 욕구가 있음을
나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아쉬운 대로 시장에서 짝퉁을 사 입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전에 사역하던 교회에서
개척교회 목회자들을 돕기 위해 정성을 모아
우리에게 재정을 보내 주셨다.
칠십만 원 정도 되는 큰돈이었다.
당시 일주일에 십만 원 생활비를 받으며 살던 우리에게
그 금액은 정말 큰 선물이었다.
남편과 나는 그 돈의 일부를
아이들 옷을 사는 데 쓰기로 했다.
둘째에게 평소 가고 싶어 하던 브랜드 매장에 가자고 했더니
아이가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엄마… 혹시 암이에요?”
“엥? 무슨 말이야?”
“아니면… 어디 많이 아파요?
그럼… 우리 집에 무슨 큰일 있어요?”
불안한 눈빛 속에
말이 되지 않는 질문들이 쏟아졌다.
“아니야. 그냥 너희 옷 사 주려고 가자는 거야.”
“근데… 왜 그런 옷을 사 줘요?”
그 말을 들으며 알았다.
이 아이에게 그런 옷은
부모가 큰 병에 걸리거나,
집에 큰일이 생겼을 때야
‘마지막 선물처럼’ 사 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라고 여겨졌다는 사실을.
매장에 들어가
아이들에게 옷을 골라 보라고 했을 때,
아이들은 선뜻 고르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맛을 안다”는 말이
참 여러 겹의 의미로 다가오던 날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새 옷을 입어 보며 신나게 웃는 아이들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그래도 그 시간들을 함께 견뎌 준 아이들이
고맙고 또 고마웠다.
둘째가 군 제대를 하고 돌아온 날,
우리는 함께 돼지갈비를 먹으러 갔다.
고기를 배부르게 먹고
냉면을 시키고,
공깃밥까지 추가로 시켜 먹었다.
냉면을 시킨 뒤 아들이 말했다.
“엄마, 우리 진짜 많이 변했다.”
“왜? 뭐가?”
“옛날에는 식당 오면 나 냉면 먹고 싶어도
차마 말을 못 했어.
더 먹고 싶어도 배부르다고 하고,
고기도 더 안 시켰어.
근데 지금은
냉면도 시키고 공깃밥도 시키잖아.
우리 진짜… 좋아졌지?”
나는 그제야 알았다.
아이 마음속에 그렇게 오래 남아 있던 기억을.
“그랬구나… 엄마는 몰랐네.
우리 아들이 그랬구나.”
세월이 흘러,
그때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만큼
아이 마음이 조금은 단단해졌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도 미안함이 함께 밀려왔다.
처음 교회를 개척했을 때,
모든 것이 부족했다.
한 달 단위로 생활비를 줄 수 있는 보장이 없었기에
우리는 일주일 단위로 생활비를 받았다.
일주일에 10만 원.
네 식구가 살아내기엔
아주 빠듯한 금액이었다.
그 시절, 집 근처에 사는
초등학교 2학년쯤 되어 보이는 소녀 한 명을 알게 되었다.
엄마의 부재로 아빠와 단둘이 사는 아이였다.
아빠가 퇴근하기 전까지 혼자 있는 시간이 힘들었는지
자주 우리 집에 놀러 오곤 했다.
어느 날,
모처럼 아이들과 짜장면을 시켜 먹기로 했다.
형편상 세 그릇이 아니라
두 그릇만 시켜 세 사람이 나눠 먹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짜장면이 도착하기 직전,
그 소녀가 초인종을 누른 것이다.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스쳤다.
‘오늘은 집에 사정이 있다고 하고,
다음에 오라고 해야 하나…?’
부끄럽지만,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내 아이들 몫이 줄어들겠다’는 걱정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의 갈등이었지만
그 순간의 나는
사모도, 좋은 어른도 아닌
그저 내 새끼들 입에 들어가는 것이 더 우선인 엄마였다.
그렇게 가난은 사람을
여유 없게 만들곤 했다.
부유한 사람들의 넉넉한 미소와 배려가
유난히 부럽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어린이 책 방문판매원이 집에 왔던 적이 있다.
“꼭 구입하지 않으셔도 되고,
설명만 들어 보셔도 됩니다”라는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믿은 것이 실수였다.
한참 설명을 들은 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다는 말을 꺼냈다.
“죄송해요. 저희는 중고 책을 구입해서 보려고 해요.”
그랬더니
현관을 나가며 그분이 이렇게 말했다.
“그럼 평생 중고 인생 됩니다.”
속상한 말이었지만,
한참 설득한 끝에 팔지 못해 김이 빠져서 그랬겠지 하고 그냥 넘겼다.
그런데 이상하게, 살면서 가끔 그 말이 떠오르곤 한다.
애써 웃으며 넘겼지만
그 말은 오래도록 가슴 한구석에 남았다.
개척하고, 너무 쇼핑이 하고 싶을 때면
구제 옷가게에 들렀다.
만원 한 장으로
한껏 나의 욕망을 달래고 돌아오곤 했다.
교회 집기를 장만할 때도
중고 시장을 돌아다녔다.
버려진 책꽂이와
이사 간 사람들이 놓고 간 장판을 주워 와
교회 지하 바닥에 깔고,
몇 번이고 쓸고 닦으며 예배 준비를 했다.
두 번째로 들여왔던 중고 냉장고가
마침내 수명을 다하고 멈춰 버렸을 때,
당근마켓을 뒤지며 중고 냉장고를 찾고 있었다.
그때 남편이 말했다.
“우리… 이번에는 새 냉장고 사자.
이제 중고는 그만 쓰자.”
나도 어느새
그 말에 선뜻 동의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 나도 이제 중고는 싫다.”
우리는 그렇게
처음으로 ‘새 냉장고’를 샀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교회가 아주 조금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 때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지역아동센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파트타임 일을 시작했었다.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하고
한 번도 ‘직장인’으로 살아본 적이 없었던 나에게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은
매 순간이 도전이었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온 건 아닐까.’
신앙인으로서
세상과 타협하지 말아야 할 지점은 분명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세요.”라고 말하며
그저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태도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양은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알아 가는 중이었다.
나는 솔직히 말해
가난이 싫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말일지도 모른다.
가난을 사랑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이렇게 쓰는 이유는,
내가 오랫동안
가난을 조금은 미화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성직자의 삶을 선택했을 때부터
나는 물질적인 욕심이나 탐욕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해 왔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부유함은 죄에 가깝고,
가난은 미덕인 것처럼 여기는 마음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면서 정작
내 욕구와, 내 진짜 마음은
차곡차곡 부정하며 살아온 셈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아마 나는
이 구절을 고백한 바울을
어설프게 흉내 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직도 ‘일체의 비결’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다만 이제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가난이 싫다.
그리고 그 마음을 부정하지 않으려 한다.”
내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보니
결국 내가 엄마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가난 때문이었다는 원망이
아주 오래,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가난을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마치 가난과는 이미 화해를 끝낸 사람인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과정 한가운데 서 있다.
삶의 모든 것은
미완으로 남아 있다.
다만 살아가면서
하나둘씩 발견하고,
조금씩 알아차려 갈 뿐이다.
짱구의 붕어빵 이야기에서 시작해
내 아이들의 떡볶이와 수박, 학원비와 브랜드 옷,
그리고 오병이어처럼 흘러왔던 도움의 손길들까지.
그 모든 장면이
오늘의 나를 만든 풍경들이다.
나는 그 풍경들 한가운데서
가난을 미화하지도,
그렇다고 그것만을 탓하지도 않는 법을
천천히 배우는 중이다.
지금도 사모이자 상담자로 살아가며,
나는 여전히 ‘가난’ 앞에서 힘겨워하는 이들을 만난다.
아주 미약하지만, 그 앞에서 내 지난 시간들이 조용히 응답한다.
가난의 골목을 지나오며 얻은 크고 작은 경험들이
이제는 나 역시 누군가의 삶에
내가 가진 것을 기꺼이 흘려보내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