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서로의 집이었다.〉

우리가 서로를 데우던 계절

by 송은영

열아홉 살, 나는 신학생이 되었다.

처음 고향을 떠나 광주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낯설면서도 나를 환한 빛으로 맞아주는 듯했다.

외로움, 긴장, 설렘이

서로의 앞뒤를 바꾸며 밀려오는 나날이었지만

그 속에서 나는 평생 잊지 못할 사람들과 시간을 만났다.

그 시절 우리들은

모두가 넉넉지 못했다.

오히려 ‘가난’은 우리 전부의 공통된 언어였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 순정 하나로 집을 떠나온

순진하고 어설프고 뜨겁던 아이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깊이 연결된 존재였다.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한 우리는

학교 근처 허름한 집을 얻어 자취를 했다.

그때만 해도 기름보일러가 있는 집에 사는 친구는

그야말로 ‘부르주아’였다.


미선이와 함께 살던 나는

연탄불을 자주 꺼트려

밤마다 번개탄을 피우며 지내야 했다.

늦은 밤, 자취방 앞을 지나던 학교 선배들이

“미선아~ 또 연탄불 꺼트렸지?

연탄불 꺼졌을 땐 ~ 번개탄~ 번개탄!”

흥얼거리듯 놀려대던 그 목소리는

이상하게 따뜻했다.

서럽고 힘든 날도 있었지만

그 농담한 줄이 우릴 웃게 했다.


밥은 늘 비슷했다.

계란 하나에 간장 몇 방울 떨어뜨려 비비면

그것이 최고의 한 끼였다.

그러다 명숙 언니가 어느 날

계란프라이에 케첩을 넣어 비벼 먹어보라고 했는데

그 맛은 정말 신세계였다.

“언니, 겁나게 맛있네?”

우리는 그날 유난히 더 많이 웃었다.


그리고 지금도 잊히지 않는 사건 하나.

바로 혜심이 언니의 흑미밥 사건이다.

그날 우리는 모두 배가 고팠다.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이 네댓 명쯤 있었는데

밥솥을 열자마자

우리는 동시에 멈춰 섰다.

밥이… 시커멓게 되어 있었다.

집에 흰쌀이 없었는데 그나마 있는 흑미로 밥을 해놓고 간 것이다.

“흰쌀이나 검은 쌀이나 같은 쌀인 게 있는 것으로 했다 “는 언니 말에 …

결국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자취방은 화려하지 않았다.

벽지는 뜯겨 있었고,

천장은 오래된 집처럼 ‘삐걱’ 소리를 냈다.

밤이면 천장에서 쥐들이 백 미터 달리기 하듯 뛰어다녔고

어느 날은 아예 방으로 내려와

명숙 언니와 미선이가 책상 위로 기어 올라가

“으악!” 비명을 지르며 떨던 밤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행복했을 수 있었던 것은 함께 하는 사람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금요일 밤이면

모두 각자 맡은 사역지로 떠났다.

나는 광주에서 남원 용정동까지

교육전도사로 나갔다.

우리 중 누구라도 면접을 보러 갈 때면

서로가 가진 옷 중 가장 괜찮은 옷을 꺼내

입혀주고

“너무 긴장하지 마!”

“하나님이 함께 하셔!”

말하며 손까지 꼭 잡아주던 친구들.

그런 마음들이

그때 나를 지탱한 힘이었다.


누군가가 시골에서 김치를 가져오면

“김치 왔다!”

외치며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밥을 나눠 먹었다.

유난히 음식 솜씨가 좋던 정숙이는

늘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밤 10시가 되면

신학교 강당에서 기도하는 소리,

오열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꿈을 걸고

절박하게 인생과 씨름하던 시절이었다.

기도하다 울고,

울다 기도하던 그 시간들.

손을 맞잡고 강당 계단을 내려오며

부르던 찬송가는 가장 큰 위로였다.


모두가 가난했던 것은 아니다.
좋은 집에서 학교를 다니던 선경이는
오히려 우리 자취파들을 부러워했다.
없는 것 투성이었지만,
우리는 서로를 데우며 살았으니까.

결혼하고 처음 맞이한 명절,
선경이는 봉투 하나를 조심스레 건넸다.
“필요한 데 써.”
그 안엔 10만 원이 들어 있었다.


남편은 변변한 겨울 바지 하나 없었기에
그 돈으로 두껍고 좋은 바지를 사 입혔다.
우리는 놀라울 만큼 오래 그 바지를 입었다.
십 년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바짓단이 닳아 헤어지고,
색이 바래 더는 입지 못하게 되었을 때도
차마 버리지 못했다.
성경이의 마음을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시절,
가진 자도 덜 가진 자도
서로의 부족을 채워주며
모두가 충분했던 시간이었다.


친구 미선이는 만날 때마다 말한다.

내가 가져다준 김치가 참 맛있었다고,

그 시절 참 고마웠다고.

하지만 나는

내가 친구들에게 준 것은 쉽게 잊었다.

오히려 받은 사랑만 또렷이 남아 있다.

그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결혼을 하고 신대원을 다니며

나는 곧바로 임신을 했다.

배는 점점 불러오고

아무리 큰 옷을 입어도 감춰지지 않던 어느 날,

명숙 언니는 나를 충장로 지하상가로 데려가

예쁜 임부복을 사 주었다.

언니의 형편을 알기에

그 마음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얼마 전 언니와 옛날이야기를 나누다가

언니가 말했다.

“너 그때 내 자취방 책상 위에 2만 원 놓고 갔었잖아.

나는 아직도 그게 잊히질 않아.”

정작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말이 참 신기했다.


우리는 자기가 준 것은 잊고,

받은 사랑만 꺼내어 오래오래 간직한다.


그 시절의 허기를 채울 수 있었던

우리가

정말 고맙고,

참 대견하고 사랑스럽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