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지 못한 시간들
남편과 결혼식 비디오를 다시 보았다.
그 속에 동생, 미라가 있었다.
내 친구들 사이에 조용히 앉아 있었고,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친언니와 친오빠, 미라가 친구들 지인석에 앉아 결혼식에 함께 했다.
다른 가족들은 모른 체해도 되었지만
미라는 달랐다.
나와 너무 닮은 그 아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때 나는 느꼈다.
미라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 앞에서는 고개를 들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그래도 나는 결혼식 날, 친가 식구들과 단 한 장의 사진이라도 남기고 싶었다.
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식당으로 내려간 사이라면 잠깐 가능할 것 같았다.
친구들이 복도 쪽을 지켜 서서 망을 봐주었다.
우리는 빠르게 준비했고, 숨을 죽이고 카메라 앞에 섰다.
그런데 그 순간, 양오빠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망을 보던 친구가 낮게 “온다…”라고 속삭이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동생 미라는 반사적으로 벽 뒤로 몸을 숨겼다.
폐 속까지 숨이 멎는 것 같았고, 심장이 귀 옆에서 뛰는 게 느껴졌다.
양오빠에게 친구들과 사진 조금 더 찍고 간다고 얼버무리며 이야기했다.
그 짧은 순간,
거짓이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았고, 손끝이 얼어붙었다.
결국 친가 형제들과 사진은 남기지 못했다.
그러고 나서 찍은 신부 사진
손은 떨리고, 입가에 웃음은 걸려 있었지만
눈은 이미 눈물로 번져 있었다.
지금도 그 사진을 보고 있으면
그날의 떨림, 숨 막히던 공기,
그리고 가슴 깊은 곳까지 번지던 서글픔이
그대로 되살아난다.
그렇게 미라는 항상 와 주었다.
내 졸업식마다 멀찌감치 앉아
눈빛만 나누고,
조용히 선물만 전해주고 돌아갔다.
아마도
엄마 곁에 내가 아닌 자신이 남겨졌다는
미안함을 그렇게 달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나는 안다.
그곳에 남겨진 가족들의 삶 역시
결코 쉽지 않았음을.
나와는 또 다른 차원의 혹독한 시간을 살아냈어야 했을 것이다.
동생 미라는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다.
그 결혼식에 간 가족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내 남편뿐이었다.
미라의 인생이기에 다 설명할 순 없지만
나와 다른 아픔을 안고 살았다.
미라는 총명했고
지혜로웠다.
동료들에게 인정받는 유능한 간호사였다.
그런 미라가
서른둘의 나이에 폐암 진단을 받았다.
자기 몸이 그렇게 무너지고 있는 줄도 몰랐다.
투병 중이던 미라는
오직 아이들 생각뿐이었다.
진통제로 정신이 흐릿한 순간에도
아이들 이름을 불렀고
아이들 얼굴을 떠올렸다.
나는 병상에서 써 내려가던 미라의 일기를 읽었다.
얼마나 살고 싶었는지,
얼마나 버티고 싶었는지
그 글에는 다 남아 있었다.
그 기도문을 보았다.
“하나님…
우리 선아가 결혼할 때까지만…
아니 사춘기 때까지만…
아니, 초등학교 입학할 때까지만…”
점점 욕심을 내려놓으며 적어 내려간 그 기도.
왜 나는
그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걸
미리 알고 있었을까.
기도해도 바뀌지 않는 것들
동생과 병원 예배당에 가
새벽기도를 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기도만큼
간절한 기도가 또 있을까.
그러나
아무리 매달려도
아무리 원망을 쏟아도
바뀌지 않는 일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물었다.
“하나님, 이유가 뭔가요?
무슨 뜻이 있는 건가요?
제가 납득할 수 있게 대답해 주실 수는 없나요?”
시간이 지나
하나를 깨달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유를 설명해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일 수도 있다는 것.
그 생각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음이
그저 다행일 뿐이다.
나는 늘
그리움을 품고 산다.
그런데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함께한 동생.
우리가 가장 오래 함께한 시간은
그 열 달이었다.
그 안에서
함께 자라고
함께 울고
함께 숨 쉬던 시간들.
나는
어쩌면 엄마가 아니라
그 동생과의 시간을
그리워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가난한 엄마가 먹었던 것이 무엇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걸 함께 나누어 먹으며 어떤 기분이었을까.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서로의 스타일은 뭔지도 얘기했을까?
그래서 미라를 처음 본 그날, 우리는 똑같은.
노란 나비 리본 바지를 입고 있었던 걸까.
대학교 때
미라 자취방에 갔을 때
내가 산 겨울 스웨터가
그 집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우리는 정말 많이 닮아 있었다.
.
-미라가 떠나기 1년 전 조카들과 찍은 사진-
동생을 보내던 그때 조카들은 겨우 다섯 살, 세 살이었다.
동생이 떠난 뒤
조카들을 몇 번 만났다
그러나 사돈어른께서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엄마를 자꾸 찾는데
지 엄마 닮은 이모를 보고 오면 더 힘들어해서요…
당분간은… 안 만나는 게 애들한테 좋겠어요.”
나는 말했다.
크면,
나이를 먹으면,
엄마 얼굴이 궁금해질 때
언제든 나를 찾아오라고.
미라는 나보다
훨씬 예쁘게 늙어갔을 테지만,
그래도
엄마를 그리워할 때
볼 수 있는 얼굴이 되어 주고 싶었다
.
그 세 살 자리 조카 아들이
군대를 제대하고
나를 찾아왔다.
180이 넘는 키에
말끔한 청년이 되어 있었고
화장품을 사 들고 왔다.
지 엄마에게 줄 선물이었을 것.
그걸 나에게 주었다.
세 살에 엄마를 잃은 아이는
너무 곧게 자라 있었다.
1년 전 찾아온 미라 딸 선아는
엄마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은지 이것저것 내게 물어보았다.
그럴만하다. 나도 엄마를 기억하는 언니에게 가끔 묻는다.
그런데
정작 내가 해 줄 이야기가
너무 적다는 것이 더 아팠다.
딸 같은 동생을 보내던 날, 언니는
엄마를 보낼 때보다
더 처절하게 울었다.
언니는
임신한 몸으로
병원을 오가며
미라를 살리려 애썼다.
출산을 앞둔 배를 안고
그 밤을 버텨냈다.
왜 우리의 이별은
이렇게도
빠르게,
거칠게
다가오는 것일까.
미라가 떠난 뒤로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만약 내가 남고 미라가 입양이 되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혹시 미라가 아니었을까?'
엄마 곁에 남겨졌다는 이유로 미라가 내게 품고 있었을지도 모를 미안함이
이제는
살아남은 나의 마음으로 되돌아온 것만 같다.
그 미안함은 사라지지 못한 채 지금도 조용히 숨처럼 남아있다.
나는 가끔
무심하게 하나님께 말한다.
"하나님…
그냥 가끔은
내 것이 아닌 시간을
한 번쯤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미라와 함께
아무 일도 없던 시간,
그저 같이 앉아 웃고
별일 없는 하루를 보내는 시간 같은 것들요.
그런 시간을
조금…
허락해 주실 수는 없었을까요.
그게 그렇게
큰 욕심이었을까요.
이제는 묻지도 않아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냥,
가슴 한쪽이 시려 올 때마다
조용히 삼켜요.
울면 안 될 것 같아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숨만 고릅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 시간이 간절해요. "
비 오는 날은 비 때문에,
바람 부는 날은 바람 때문에,
눈부시게 푸른 날은
너무 푸르러서…
나는 여전히 그리움 속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