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친애하는 친구들 >

-지선이, 미성이, 명숙이-

by 송은영


돌이켜보면 혼자서는 버텨내기 어려웠을 시간들이었다.

어떻게 그 시간을 지났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게는 늘 따뜻한 봄 같은 친구들이 곁에 있었다.

그것은 내 인생에 너무 커다란 선물이었다.

내 인생의 피난처는 교회만이 아니었다.

사람의 얼굴을 한 피난처도 있었다.

지선이, 미성이, 명숙이.

내가 무너지지 않게 붙잡아 준 이름들이다.

고 3이 되기 전, 고 2 겨울 서해안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 20년이 지나 그곳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10년 뒤, 또 10년 뒤, 또 10년 뒤에도 빈자리 없이 사진을 찍자고 약속했다.

열여덟의 모래 위 약속, 스무 해, 서른 해가 지나 다시 만나다.



지선이

지선이는 아주 씩씩하고 용기 있는 아이였다.

내게 자전거를 가르쳐 준 것도 지선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신문 배달을 하던 지선이가

컴퓨터 학원비로 고민하던 내게 함께 하자고 제안을 했다.

새벽 시간 신문 배달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나는 한 달도 못 채우고 그만두고 말았다.

그 어려운 일을 지선이는 1년 가까이 한 대단한 아이였다.

내 모든 속사정을 알고

언제나 내게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나는 대학에 합격했고

지선이는 안타깝게 떨어져 재수를 하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일주일에 한 번 학교 저금 날이 있었는데

졸업하며 받은 그 돈 전부로

지선이는 내게 선물을 해 주었다.

이제 여대생이 되었으니

화장도 해야 하고

옷도 필요하지 않겠냐며

화장품과 새 옷을 사 주었다.

자신의 돈을

아낌없이 나에게 쓰고

진심으로 행복해했다.


대학합격을 아무도 축하해주지 않던 집으로 돌아가던 날,

내 손에 들려 있던 그 선물 보따리는

나를 초라하게 만들지 않았다.

지선이는 그렇게

늘 내게 큰 버팀목이었다.


대학에 붙어서도 방학이면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고 했다.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서도

내 생일이 되면 립스틱을 사서 광주에 있는 학교까지 직접 찾아와 주곤 했다.


엄마가 돌아가신 날에도,

동생이 먼저 떠났을 때도

지선이는 누구보다 많이 슬퍼해 주었다.


동생 미라의 장례식이 끝난 날,

지선이를 배웅하며 택시를 잡는데

지선이는 한참 동안 차에 타지 못하고 서 있었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고

내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다.

“은영아…

이제 네가 좀 그만 힘들었으면 좋겠어.

이제는… 더 이상 울 일 없었으면 좋겠어.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 말이면

나는 충분했다.


이 세상에

내가 진짜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빌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

나는 충분히 부유한 사람이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양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지선이는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대신 남원에 계시던 지선이 엄마가 오셨다.

유방암으로 투병 중이셨던 엄마는

머리에 모자를 쓰고

야윈 몸을 이끌고 장례식장으로 오셨다.


“지선이가 못 와서

마음이 영 안 좋은가 봐.

나더러 대신 좀 가 보라고 그러더라.

몰골이 이래도… 그냥 왔다.

은영아… 어쩌냐…

아가… 어쩌냐….”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친구 엄마’가 아니라

그냥 ‘엄마’와 함께 울고 있었다.

한참을 안고 울었다.

지선이가 와 준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내 행복을 빌어주는 내 친구, 지선이.

술 한 잔 들어가면

여전히 울먹이며 말한다.


“가시나야,

너 이제 잘 살아야 해.

너만 행복하면 돼. 그거면 돼….”


지선이가 내 삶의 ‘울타리’였다면,

미성이는 내가 삶을 바라보는 ‘자세’를 배우게 해 준 친구였다.

미성이

미성이는 언제나 삶 앞에서 도망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가장 두려운 순간에도

자기 선택을 외면하지 않았고,

‘책임’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 전에

이미 몸으로 살아내던 사람이었다.

우리 넷 중 공부를 제일 잘했고,

야무지고 똑소리 나던 언니 같은 친구였다.

남원에서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은

전주로 유학을 갔는데

미성이는 그렇게 전주로 갔다.

집을 떠나 자취하며 공부하는 삶이

결코 쉬웠을 리 없지만

내가 힘들 때마다 보내준 편지 속 문장은

지금도 마음 깊이 남아 있다.


“은영아,

진짜 너무 힘들 때는 새벽시장을 가 봐.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보면서

마음을 다잡아.

우리 조금만 더 힘내자.”


나는

그 단단함이 참 부러웠다.


미성이는 늘 새벽 같은 사람이었다.

아직 어두운 시간에

스스로를 일으킬 줄 아는 사람.

어떤 삶은

피할 수 있음에도

등을 돌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

미성이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


부천에 와서 개척교회를 섬길 때

서울에 살던 미성이는

한동안 우리 교회에 와 함께 섬겨 주었다.

친구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미성이는 늘

지켜야 할 것을 끝까지 붙드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아마 그 어딘가에서

새벽처럼 먼저 일어나 하루를 감당하고 있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티 내지 않아도

여전히 자기 삶의 가장 무거운 자리를 피하지 않으면서.

그래서 나는

미성이를 존경했다.

미성이가 삶의 방향을 가르쳐 주었다면

명숙이는, 내가 ‘쉬어도 되는 자리’를 알려 준 친구였다.

명숙이

명숙이는 늘 작았다.

교실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것 같은 아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속은 단단한 아이였다.

먼저 내게 다가와 준 사람도 명숙이었다.

훗날 들었는데

명숙이 언니와 내 친언니가 친구였다고 한다.

그 덕분에

내 동생 미라를 미리 알고 있었고

“저 아이를 내 친구로 만들어야겠다”는

작은 결심을 했다고 했다.

그 발칙한 호기심이

지금까지 나를 지켜준 인연이 되었다.


명숙이는 글 쓰기를 좋아했다.

집 형편은 좋지 않았다.

엄마는 타지에서 일했고

집은 늘 비어 있었다.

화장실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암모니아 냄새가 지독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집이 편했다.

우리들의 아지트는

늘 명숙이 집이었다.

엄마가 일주일에 한 번

반찬을 해 놓고 가신 날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상이었다.

나는 그 집에서 제일 많이 밥을 얻어먹었다.


시간이 흘렀다.

명숙이는 늦게 공부를 시작했고

그 어렵다는 논문을 쓰고

석사 학위까지 받았다.

지금 그 집에 가 보면

화장실이 가장 깨끗하다.

어쩌면

그 오래된 기억이

그 아이를 다르게 만든 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아이가 자랑스럽다.

아주 많이.


친구라는 피난처

지선이, 미성이, 명숙이.

좁은 방,

이불 한 장에 의지해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나누던 이야기들.

짝사랑하던 교회 오빠 이야기,

웃고 울던 시간들.

그 시간들은

내가 유난한 아이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아이였다는 걸

확인시켜 주던 시간이었다.


내 비빌 언덕들.

나의 친애하는 친구들.

나 혼자였다면

결코 건너지 못했을 것들을

이 아이들이 함께 건너 주었다.

나는 그 사실이

지금도 참 고맙고,

사무치게 따뜻하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