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별이 되어 돌아오던 시간
고향 남원에서 버스를 조금 더 타고 들어가면, 오래된 한센병 마을이 하나 있었다.
더 이상 전염의 위험은 없으나 몸과 마음에 한센병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일반인들과는 살기 어려워
따로 마을을 이루어 사시는 분들이었다.
대학교 2학년이 되던 해, 나는 그곳으로 교육 전도사로 나가게 되었다. 스무 살이었다.
1학년 여름성경학교를 도와주러 갔던 인연으로, 그곳을 섬기던 선배 언니가 사임하며 나를 추천해 준 것이다.
부모님께 이 소식을 전하자 아빠는 단호했다.
“문둥이들 사는 마을에 네가 왜 가! 남원시내 사람도 그 근처 목욕탕은 안 간다더라.
도대체 너도 문둥이 될 일 있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절대 못 가!”
나는 아무렇지 않다고, 괜찮다고 애원했지만 아빠는 기어이 내 방 문에 자물쇠를 채우셨다.
평생 부모님 말씀을 거스른 적이 없던 내가 방 안에서 울며 간청하자, 아빠는 결국 깨달으신 듯했다.
딸이 더 이상 ‘자기 딸’만은 아니라는 것. 서서히 하나님이라는 분의 딸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며칠을 밥도 안 먹고 울기만 하자 아빠는 마침내 손을 드셨다.
그리고 사역하러 떠나는 첫날, 아빠는 문 앞에서 바카스 하나를 건네주셨다. 아무 말 없이 무심하게 툭 건넨 바카스 하나로 이미 아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빠는 한동안 용정마을에서 주신 달걀도 드시지 않고 버리라고 하셨다.
수건도 따로 쓰라고 하셨다.
그래도 나는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다.
내겐 그 모든 두려움을 이길 만큼의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으니까.
용정마을은 돼지와 소, 닭을 키우는 집이 많아 늘 진한 삶의 냄새가 공기에 배어 있었다.”
토요일마다 목사님과 심방을 가면 파리가 먼저 음식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목사님은 “대접하는 것이 그분들에겐 기쁨”이라며 꼭 먹어드리라고 알려주셨다.
일그러진 얼굴, 뭉개진 손가락, 털이 빠져 유독 진하게 눈썹을 그린 여집사님들.
그 흔적은 아픔의 역사였고, 동시에 오랜 생존의 증거였다.
한 집사님은 세수를 하다 눈썹이 빠지는 것을 보고 병원을 찾았고,
그 길로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미 남편과 아이가 있었지만, 병이 확인되는 순간 부산의 한센병 환자촌으로 들어가야 했다고 한다.
마지막 이별의 인사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 후로 한 번도 가족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 마을엔 사연 없는 사람이 없었다.
한센병 환자들은 나라에서 아예 아이를 낳지 못하게 수술을 시켰기에
반대로 마을에는 유독 ‘입양된 늦둥이들’이 많았다.
성도들의 귀염둥이 나영이도, 장로님 딸인 줄 알았던 현숙이도 입양아였다.
욕쟁이 엄마와 살며 방황하던 현숙이는 밤마다 화장을 짙게 하고 나가 놀다가
“전도사님, 오늘만 재워주세요…”
하며 내게 찾아오곤 했다.
집에 가면 맞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전도사가 거짓말을 하면 안 되지만
나는 그 아이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가끔은 “현숙이랑 같이 있었습니다. 때리지 마세요.”라고 엄마께 말하곤 했다.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면, 그 아이가 흘리지 못한 흐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장로님 댁의 딸 선숙이는 나를 가장 괴롭히던 악동이었다.
무슨 말을 하면 상처받을지 너무 잘 알고, 그곳을 정확히 찔러댔다.
“전도사가 대단한 줄 알아요? 별거 아니라면서!”
어느 날, 그 애가 갑자기 사택으로 찾아와 엉엉 울며 말했다.
“전도사님… 장로가 왜 그래요? 왜 엄마를 때리고 저를 때려요?
저는 친딸 아닌 것 같아요. 어디서 주워왔을 거예요…”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아이는 입양된 아이였다.
그날 그 아이의 눈물은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리고 사역을 마무리하던 날,
가장 심하게 나를 괴롭히던 그 아이가 제일 크게 울며 가방을 발로 차고
“가지 말라고! 가지 마!!”
하며 버텼다.
투박했지만, 그것이 그 아이가 이별 앞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절박하고도 솔직한 몸짓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2년의 눈물과 기도가 보상받는 듯했다.
3학년이 되던 해, 목사님이 미국으로 박사 공부를 가며 두 달 동안 모든 예배를 내게 맡기셨다.
새벽예배를 인도하려고 밤을 새우던 날도 많았다.
때로는 실수로 잠들어 새벽예배를 펑크 내기도 했는데
성도들은 단 한 번도 나를 나무라지 않았다.
“아이고 전도사님이 우리 딸 같은데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괜찮아요.”
내가 깰까 봐 일부러 조용히 기도하고 오셨다고 했다.
그분들의 마음결은 참 고왔다.
그분들의 선함은 어떤 꾸밈보다 깊었다.”
그곳에 사는 분들이 모두 한센인들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상인이지만 인생 막다른 곳까지 밀려와 그 마을로 들어온 이들도 있었다.
그중에는 매일 교회 종을 치던 양집사님도 있었다.
딸 둘, 아들 둘.
한 번도 화내는 걸 본 적 없는, 내가 꿈꾸던 가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놀랍게도 그 집의 큰딸은
고등학교 시절 내 친구 선화였다.
예배 때 우연히 마주쳤을 때 서로 놀라 어쩔 줄 몰라했다.
그 이후로 집사님은 더 나를 딸처럼 챙겨주셨다.
교회 곳곳에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이 있었다.
3학년 어느 날, 엄마가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르고 토요일에 교회로 가던 길,
언덕 위 사택에 들어서자 긴장이 풀리며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날 중고등부 모임에서 기도를 부탁하는 순간
참고 버티던 감정이 무너져버렸다.
아이들도 함께 울기 시작했다.
그 아이들은 누구보다 ‘버려짐의 아픔’을 잘 아는 아이들이었다.
이 마을에 산다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한 번도 집에 친구를 데려온 적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이 한 명씩 내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소리는
내 생에서 가장 깊은 위로였다.
21살 어린 전도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지금은 개척교회 사모로 18년째 살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만큼 한 영혼을 사랑했던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때 마음속에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은 이랬다.
“너도 그래, 은영아.
내가 어찌 널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니?
너는 내게 그런 아이다.”
그리고 그 음성 같은 마음의 울림은
지금도 내 삶을 비추는
작은 등불처럼 남아 있다.
하나님이 나를 그곳에 머물게 하신 2년의 시간은
내게 큰 선물이었다.
어찌 보면 다윗이 피난을 다니며 만났던
‘아둘람 굴의 사람들’ 같았다.
저마다 상처투성이었고 삶이 구겨져 있었지만,
그분들의 상처는 내게 가시가 되어 돌아오지 않았고,
오히려 별이 되어 내 마음에 남았다.
그 시간은 내 삶의 방향을 조용히 틀어놓은 여정이었고,
하나님의 마음결을 조금 더 가까이 느껴가던 배움의 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처 난 영혼들이 서로를 품어주던 그 자리에서
나는 사랑이 얼마나 묵직한 힘을 가진 것인지,
사랑이 어떻게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지,
그 깊은 진리를 비로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