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건네는 말-
울 언니
마음 고달픈 것보다 몸 고달픈 게 차라리 낫다며
시골로 귀농한 울 언니
계절마다 보내준 햅쌀, 밤호박, 콜라비, 표고버섯..
울 언니 고단한 몸뚱이 함께 배달되어 오느라
택배기사님이 더 힘들어 보였나 보다.
아주 작아도 괜찮으니 비빌 언덕 하나 있으면 좋겠다던 울 언니.
이제 다 떠나고 없단다.
그 언니가 나에게 비빌 언덕 돼주려고
애써 웃어주고 애써 씩씩하다.
울 언니 미소 너머 그 어딘가에 털썩 주저앉아
망연자실 울고 있는 어린 소녀가 한없이 애처롭다.
영암에 살고 있는 그 어린 소녀 만나러 가야지.
가서 서로 비빌 언덕 되어줘야지.
이 시를 쓰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언니에게 받은 것들을 너무 오래 ‘당연한 것’처럼 지나쳐 왔다.
이제는 그 마음의 택배 상자를 조용히 풀어놓고, 언니라는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고 싶다.
내 삶을 뒤돌아보는 글을 쓰다 보니 문득 멈춰 섰다.
분명 잃은 것이 많지만, 여전히 내게 남아 있는 것들도 많은데
나는 그걸 놓치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너무 이른 이별은 서글프고 아팠다.
그럼에도 내게는 소중한 사람들이 참 많다.
그중 한 사람이 우리 언니이다.
언니는 나보다 세 살 위지만 내게는 늘 너무 큰 사람이었다.
때로는 안쓰럽고, 때로는 미안하고, 그래서 더 자주 마음이 기운다.
돌이켜보면 나는 ‘입양 보내어졌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아온 것 같다.
나를 보낸 친가 쪽에서는 늘 내게 미안해했다. 그 마음이 내게로 오면, 언니의 마음도 함께 생각났다.
언니는 초등학교 때 내게 종이학 천마리를 준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주었다.
언니는 글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대학을 포기하고 일찍 직업전선으로 들어섰다.
엄마가 아빠 노릇까지 해야 해서 집을 비우고 서울로 식당 일을 하러 갔을 때,
언니는 동생 미라의 보호자가 되었다. 동생에게 언니는 엄마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언니의 고등학교 시절, 아빠가 바람을 피워 살던 여자분의 딸과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생각했다.
언니가 책을 쓴다면, 언니의 삶도 나의 삶 못지않게 만만치 않을 거라고.
내가 고등학교 때 언니는 학원 선생님을 했다.
월급이 넉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무렵 집에서 공부할 환경이 안 되어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것이 유행이던 때가 있었다. 독서실에 가고 싶었던 나는 독서실비를 언니에게 부탁했다.
그때 언니를 만났던 고려당 빵집이 지금도 선명하다.
‘언니’라고 부르지만 어딘가 조금은 어렵고, 그렇지만 ‘언니’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기대고 싶었던 마음. 언니는 내 부탁을 따뜻하게 받아주었고, 흔쾌히 지원해 주었다.
언니는 내가 신학대학에 가고자 하는 꿈을 유난히 반가워했고 지지해 주었다.
어쩌면 내 꿈의 첫 후원자가 언니였는지도 모른다. 언니는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했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언니가 어떤 꿈을 품고 있는지,
언니는 누구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는지, 언니는 어떤 포기를 삼키며 살아가고 있는지.
대학에 붙었을 때 언니는 생활에 보태라며 오십만 원을 쥐여주었다.
그건 돈이라기보다, 용기 내어 꿈을 향해 첫걸음을 떼는 내게 건네준 든든한 응원이었다.
언니는 아빠와 오빠가 돈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해결하느라 바빴고,
그 일은 아빠가 돌아가신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엄마가 남의 식당에서 번 돈과 언니가 고생해서 번 돈으로
드디어 아파트를 사서 입주하던 날이 한 달 남았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언니와 동생이 그 집에 산 지 1년 조금 지나, 오빠의 도박 빚을 갚느라 그 집을 팔아야만 했다.
그런데도 언니는 오빠를 품었다.
엄마 교통사고로 나온 피해보상금이 있었지만,
어린 언니와 동생이 관리하기 어렵다고 외삼촌에게 맡겼다가 큰 손실을 겪었다.
내가 결혼할 때 전해준 천만 원을 제외한 나머지 돈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언니는 그 삼촌까지 품었다.
언니는 뒤늦게 사회복지대학에서 공부했고,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는 그룹홈에서 일했다.
그 선택은 생계를 위한 직업을 넘어서, 미뤄두었던 언니 자신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방식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언니가 그 일을 택한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언니도 나도 미라도, 엄마를 닮아서인지 우리의 마음은 자주 소외된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내가 큰아이를 낳기 위해 제주 시댁에 가 있었을 때도, 언니는 친정엄마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제주까지 내려와 며칠을 있다 갔다. 친정엄마 대신 제주 부모님들을 먼저 만난 것도 언니였다.
어느 날은 글을 써서 당선이 되어 상금을 받았다며 나를 찾아와 옷을 사주기도 했다. 내가 두 아들 키우며 정신없이 살 때는, 틈틈이 시간을 내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을 잔뜩 사와 집에 놓고 바삐 돌아가기도 했다.
언니도 처음부터 언니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워본 적도 없었을 텐데, 언니는 늘 어른의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이제야 그 시간이 얼마나 외로운 연습이었을지 짐작해 본다.
요즘도 언니와 통화를 하면 언니는 늘 같은 말을 한다.
“은영아~힘들지? 조금만 더 고생하자. 언니가 돈 많이 벌면 맛있는 거 사줄게.”
어느새 나이가 쉰이 넘은 내가, 언니 눈에는 아직도 한없이 어린아이인 모양이다.
언니는 늘 주지 못해 안달이고, 나는 늘 받기만 한 사람 같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 언니가, 그 어릴 적 소녀를 오늘은 어떻게 마주하고 있을지 자꾸 생각한다.
그래도 언니 곁에 언니를 꼭 닮은 착하디 착한 형부와, 공부도 잘하고 총명한 두 아들이 있어 마음이 놓인다. 그들이 언니의 하루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 주기를 바란다.
통화를 끊고도 한참, 언니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정한다.
언니, 이제는 내가 말할게.
“언니 ~힘들지? 조금만 쉬자. 이번엔 내가 언니의 비빌 언덕이 되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