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지막 엄마 안녕!

- 복순이랑 영순이랑 만난 날 -

by 송은영

시아버님을 코로나 후유증으로 갑자기 천국으로 보내드린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시어머님은 대장암 진단을 받으셨다.

이미 간으로 전이가 되어 간의 70%를 절제하고, 대장을 제거하는 큰 수술을 하셨다.
아버님과의 이별 뒤라 마음도 몸도 힘드신 줄로만 알았다.

병이 그렇게 깊이 들어가 있는 줄은 몰랐다.

어머님께는 상태를 다 말씀드리지 못한 채 수술을 받으셨고,

준비도 못 하신 채 제주가 아닌 서울—우리 집에서 거의 1년을 항암치료로 살아내셔야 했다.


<어머님 전용접시>


어머님을 모시기로 한 날, 나는 예쁜 접시를 샀다.

입맛을 잃으실까 봐, 그릇이라도 예쁘면 한 숟갈에 더 넘어갈까 봐.

어머님 전용 식사 접시는 우리 식탁 위에 작은 표식처럼 놓였다.


어머님은 의지가 강하신 분이었다.

열두 번의 항암치료를 놀랍도록 잘 견뎌주셨다.

우리가 준비한 음식은 한 번도 남기지 않고 꼬박꼬박 다 드셔주셨다.


포비와 나는 재래시장에 일주일에 두 번은 갔다.

어머님은 잡채를 좋아하셨고 단호박도 즐겨 드셨다.

미역국을 끓여드리면 “너무 뻣뻣하다”라고 하셔서,

부드러운 미역을 찾아 시장 구석구석을 헤맸다.

그러다 생미역을 판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날부터 생미역으로 미역국을 끓였다. 그제야 어머님은 미역국도 잘 드셨다.

우리 네 식구 살 때는 비싼 과일은 엄두도 못 냈는데

어머님 드시는 것에는 아낌이 없었다.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 시간은 어머님 덕분에 우리도 잘 먹고 건강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항암을 하고 오시는 날에는 입맛이 없으셔서

전복죽, 문어죽, 꽃게살을 발라 푹 끓인 게살죽 같은 것들을 만들었다.

어머님 덕분에 내 요리 실력도 늘었다.

변비로 고생하시던 어머님이 ‘성공’ 하시는 날에는 함께 기뻐했다.

출근길에 간식을 챙겨드리면 어머님은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무슨 호사를 누리나 싶다. 간식 같은 것도 챙겨 먹고… 아프니까 이런 것도 받고, 좋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저렸다.

건강할 때도 누릴 수 있었던 것들을 어머님은 너무 늦게 받으셨다.

그 호사는 기쁨이라기보다 늦게 도착한 사랑의 모양 같았다.

서울 아파트 생활이 답답하실까 봐 자수 도구를 주문해 드렸다.

어머님은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가방을 수놓아 만들어주셨고, 제주 가서 줄 손주들 것도 만들었다.

그렇게 선물보따리를 차곡차곡 쌓아두셨다.



<귤나무 자수>

수를 놓는 시간마다 찬양이 흘러나왔고, 그 고운 소리가 집 안의 공기를 다르게 만들었다.

아파트 앞 작은 텃밭을 지나실 때면 운동 삼아 잡초를 뽑아주시곤 했다.

바지런함은 어머님의 언어 같았다.



열두 번의 항암치료를 마치고 제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던 어느 아침,

어머님이 화장실에서 쓰러지셨다. 패혈증이었다.

42시간 안에 균을 찾고 항생제를 맞추지 못하면 위험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어머님은 중환자실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몇 차례 넘기셨다.

한 달 가까이 중환자실을 버티신 뒤 격리실에서 또 한 달.

균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고,

격리치료가 가능한 요양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요양병원에는 절대 보내지 마라.” 하셨던 어머님을 모시던 날,

어머님은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우셨다. 버리고 가는 줄 알았다고 하셨다.

우리는 병원에 양해를 구하고 매일 도시락을 싸서 찾아갔다.

도시락은 음식이기도 했지만 마음의 증거이기도 했다.


3개월 가까이 누워 계신 탓에 근육이 빠져, 걷는 연습을 해야 제주에 갈 수 있다는 말에

어머님은 이를 악물고 운동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제주 집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님이 제주에 가신 지 3개월쯤 되었을 무렵,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꽃게를 쪄서 들고 제주로 가던 길에 내 몸이 먼저 무너졌다.

비행기 안에서 무릎이 끊어질 듯 아팠고, 나는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끝까지 참고 제주에 도착했지만 결국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향했다.

주일이라 검사도 쉽지 않았고, 나는 제주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한 달 만에 어머님 얼굴을 뵈러 가는 길이었는데, 끝내 뵙지 못했다.


다음 날 병원에서 전방십자인대 파열이라 수술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수술 후 긴 입원과 재활이 시작되었다. 어머님과 통화할 때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에고… 내가 안 아팠으면 가서 네 수발 들어줄 건데…

가도 못 하고… 내가 복이 없다. 네 얼굴도 못 보고…”


별거 아니라고 안심시켜 드려도,

어머님 목소리에는 내가 그냥 돌아왔던 그날의 아쉬움이 오래 남아 있었다.

퇴원 다음 날 주일 아침, 제주에서 연락이 왔다.

어머님이 위독하시다고, 곧 가실 것 같다고.
항암치료를 마치셨지만 폐 전이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연세가 있으니 급격하진 않을 거라고 했다.


전날 통증이 심해 병원에서 주사를 맞으셨다는데, 어머님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소식을 들었을 때 무엇 하나 제자리에 놓이지 않았다.

가시는 길을 이런 몸으로 맞이해야 한다는 것도,

마지막 얼굴을 끝내 뵙지 못한 채 돌아왔던 것도 속상했다.


휠체어를 타고 겨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말도 안 되게 나는 장례식장에 도착해 어머님을 보내드렸다.


어머니는 내 마지막 엄마였다.

나는 참 많은 ‘엄마’를 만나고 헤어졌다.

그중에서도 어머니는 제일 엄마 같은 엄마였다.

그 엄마가 가시는 날, 나는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복순이랑 영순이가 만날 날


어머님.
천국은 잘 도착하셨지요? 아버님도 만나셨겠죠?

아버님이 그렇게 갑자기 떠나셔서 끝내 듣지 못했던 말…

아버님께 그토록 듣고 싶었던 “미안했다”는 말은 들으셨는지요.
평생 가슴에 묻어두신 큰딸, 수경 형님도 만나셨겠네요.

<아버님과 어머님>

어머님.
그런데 어머님을 꼭 만나고 싶어 할 한 사람을 소개해 드릴까 해요

. 어쩜 이미 만나셨을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엄마, 윤영순 씨요. 웃는 모습이 저랑 많이 닮아 있을 거예요.

혼수 준비도 함께 해주시고, 임부복도 손수 만들어주시고,

두 아들 산후조리며 손주 이불까지 다 만들어주셨지요.
우리 엄마가 어머님을 만나서

“우리 딸 엄마가 되어주셔서 고맙다”며 엄청 반가워하실 거예요.
복순이랑 영순이가 만나 뒤늦게라도 상견례하시면 좋겠네요.

우리 엄마랑 어머님이랑 손잡고 둘이서 좋아하시는 찬양 원 없이 하면서

신나게, 재미지게 지내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좋아하는 빨간 머리 앤에서 앤셜리와 다이애나가 둘이 춤추듯이

그렇게 좋은 친구가 되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언젠가 어머님이 제게

“나는 너 딸이라 생각하는데, 왜 엄마라고 안 부르냐”라고 하셨지요.
어머님, 평생 불러보지 못한 ‘엄마’라는 말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질 않았어요.
엄마가 돌아가신 날 언니도 동생도 엄마를 부르며 우는데,

저는 부를 이름이 없더라고요.

그 ‘엄마’라는 말이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끝내 나오질 않았어요.


어머님.
이제 전화하면 마지막에 꼭 “고맙다. 사랑해.”라고 해주시던

어머님의 그 따뜻한 음성은 더 들을 수 없겠네요.

그래도 제 마음속에는 고스란히 남아, 지금껏 해주신 그 말들을 하나씩 다시 꺼내어 곱씹어볼 거예요.


어머님을 만나 어머님 딸로 산 세월이 28년이에요.

가장 긴 시간 제 엄마로 살아주신 거 아세요?
제 마지막 엄마가 다른 이가 아닌 어머님이어서, 너무 감사하고 고마워요.

이다음에 천국에 가서 만나면 그때 다시 들려주세요.

“사랑해”라는 말이요.


저는 어머님이 유품으로 남겨주신 십자가 목걸이를 보며, 때론 만지작거리며 어머님을 그렇게 기억할게요.

어머님이 수놓던 바늘 끝의 정성, 흥얼거리던 찬양, 식탁 위 예쁜 접시와 도시락의 온기까지..

그 모든 것이 그 작은 십자가에 조용히 매달려 있는 듯해요.

이제야 어머니를 엄마라고 불러봐요.


나의 마지막 엄마, 안녕.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