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아자!, 3,000원, 포비

-반복은 때로 가장 성실한 고백이 된다-

by 송은영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뒤로, 내게 작은 의식이 생겼다.

글을 발행하고 화면을 닫으면, 어느 순간 “아자아자”라는 말이 도착한다.

그리고 3,000원이 따라온다.
그 돈이 커서가 아니다.

금액이 아니라 방식이 사랑처럼 느껴져서,

나는 그 알림을 받을 때마다 묘하게 힘이 난다.


그 사람의 이름은 포비다.
예상했겠지만, 그이는 내 포비다. 그러니까 내 배우자다.


포비를 처음 만난 건 대학 1학년 때였다.

장애인들을 섬기는 동아리에서 선배로 만났다.

왜소한 체격에 작은 키,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눈매.

고향이 제주라서 인지 문장 끝에 남는 억양이 독특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가 이렇게 오래 함께 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대학 2학년 때, 나는 짝사랑하던 사람이 연인이 생겼다는 걸 알고 크게 흔들렸다.

그 마음을 처음으로 길게 털어놓은 사람이 포비였다.

포비도 그 무렵 연애를 정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를 가열차게 위로했다.
“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잊히는 거라며.”
그 말이 얼마나 허세 섞인 위로였는지, 지금의 나는 안다.

그래도 그때의 우리는 그 말에 기대야 했다.

괜찮아질 거라고, 그렇게라도 말해야 하루가 넘어갔다.

그렇게 속 얘기를 나누다 보니 포비와 내 사이에는 ‘내적 친밀감’ 같은 것이 생겼다.

나는 내 성장 과정과 내 안의 복잡한 이야기들을 조금씩 꺼내놓게 되었다.
그런 시간을 가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포비는 며칠 여행을 다녀왔다.

돌아온 포비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네 이야기 듣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떴는데,

갑자기 ‘은영이 어떡하지’라는 마음이 들더라. 온통 네 생각뿐이었어.”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했다.

동정이라고 여겼다. 오래가지 않을 마음이라고,

시간이 지나면 흐려질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포비는 흐려지지 않았다.

어설펐지만, 우리는 여러 고비를 넘어 결국 사귀게 되었다.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고, 나는 제2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요즘 유행하는 MBTI로 말하면, 포비와 나는 맞는 게 하나도 없다.

서로의 다름이 매력이어서 끌렸다고 말하면 그럴듯하겠지만,

솔직히 말해 그때의 나는 무엇이 다른 지조차 잘 몰랐다.

너무 어린 나이에, 그저 나를 한결같이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좋았다.

그 단순함이 내게는 충분했다.



포비와 내가 다녔던 학교는 광주에 있는 신학대학교였다.

기숙사동이 따로 없고, 기숙사가 강의실과 연결되어 있을 만큼 아담한 학교였다.


내가 기억하는 포비는 1년 내내 거의 단벌신사였다.

하늘색에 삼선이 그려진 운동복을 늘 입고 다녔다.

사실 그 시절 신학교에 다니는 사람들 중 특별히 부유한 사람이 많지 않아서

그런 옷차림은 익숙한 풍경이었다.

다들 비슷했고, 다들 통용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도 포비는 유독, 자신에게 무언가를 ‘사는 것’에 서툰 사람이었다.

새 옷도, 좋은 신발도, 작은 사치도. 포비에게는 늘 “굳이?”가 먼저였다.


포비는 다섯 형제 중 둘째였다.

시부모님은 해남이 고향인데,

젊은 시절 제주로 내려가 남의 밭일을 하고 돌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셨다.

자리를 잡기까지 부모님을 모시고 다섯 자녀를 키우는 일이 얼마나 고되고 막막했을지,

나는 감히 가늠할 수 없다.
포비는 “어릴 때 잘못 먹어서 키가 안 컸다”며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웃으며 넘기지만, 그 말속에는 분명한 사실이 들어 있다.

정말 많이 가난했다는 것.


포비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어머님이 큰 병으로 오랜 시간 누워계셔야 했고, 포비는 충분한 돌봄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 와중에 가장 의지가 되고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큰누나가 세상을 떠난 일은,

포비에게 오래 남은 상실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양아빠를 보며 ‘남자란 이래야 한다’는 막연한 기준을 배웠던 것 같다.

양아빠는 돈을 벌면 그때그때 기분대로 쓰는 사람이었다.

온 동네 사람들을 데리고 한정식집에 가서 밥을 사고, 사람들은 “형님”이라 부르며 따랐다.

그 ‘대범함’이 멋처럼 보였고, 나는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남성의 기준으로 저장해 버렸다.


반면 포비는 돈에 있어서 아주 계획적이고,

자기 형편에 맞게 써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사소한 일에도 자주 부딪혔다.

그리고 나는 어느 날,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포비에게 던지고 말았다.


“당신은 왜 이렇게 쪼잔해? 좀 대범하면 안 돼?”


그 말은 포비를 평가한 말이기도 했지만,

더 정확히는 내 머릿속에 저장된 ‘아빠’를 통해 각인된 남성상이 튀어나온 순간이었다.

내가 옳다고 믿어온 세계의 규칙이, 내 입으로 그대로 흘러나온 것이다.


포비가 가장 예민해지고 화를 내는 순간은 배가 고플 때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에게 아주 인색한 사람이

가장 너그럽게 허용하는 지출은 ‘먹는 것’ 일 때가 있다. 포비가 딱 그랬다.

한 번은 포비가 상담을 받은 뒤,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고 말해준 적이 있다.



포비가 8살쯤 되었을 때 이야기다.

그때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고,

어느 날 아버지와 함께 참새를 잡았다고 했다.

그 시절엔 밥이 전부였고, 간식 같은 건 흔치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 곁에서 참새를 구우며, 어린 포비는 군침이 돌고 너무 먹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데 참새가 다 구워진 뒤, 아버지가 말했다.


“현수야, 할아버지 가져다 드리고 와라.”


포비는 적어도 참새 뒷다리 하나쯤은 자기 몫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가져다 드려라” 한마디만 했다.

포비는 서운했지만, 그대로 할아버지께 참새를 가져다 드렸다.


할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참새를 다 드셨다.

“너도 먹어봐라” 같은 말은 끝내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때의 포비는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고 했다.

점점 줄어드는 참새를 보며,

혹시나… 혹시나… 기다리던 마음.

더 이상 남지 않았을 때 밀려온 절망감은 얼마나 컸을까.


그런데 포비가 더 오래 붙잡고 있던 건,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대한 서운함만이 아니었다.

포비는 말했다.

그 순간 왜 자신은 아무 말도 못 했을까.


“저도 먹고 싶어요.”


그 한마디를 했더라면, 아버지도 그렇게까지 모른 척하진 않았을 것 같다고.
서운함보다 더 컸던 건,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자기 자신에 대한 화였다.

바보 같았고, 그런 자신이 미웠다고 했다.

그날의 분노는 밖으로 뻗지 못한 채 조용히 접혀 들어가, 자기 안쪽에서 오래 남아버린 것 같다고.


그날 포비가 못 먹은 건 참새 한 마리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너는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 “너는 여기 있지만 없는 것과 같다”는 느낌.

존재가 부정되는 것 같은 거절감이 함께 남았을 것이다

.
말을 삼킨 아이는 배고픔보다 먼저 자신을 혼냈다.


그때 포비에게 먹지 못했던 참새보다 더 오래 남은 건,

필요를 말하지 못했던 순간의 자기 분노였을 것이다.


그래서 포비가 왜 먹는 것에 그렇게 예민한지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평소 내가


“필요한 거 없어?”

라고 물으면 늘

“없다”

라고 답하던 포비가 떠올랐다.


그 ‘없다’는 말이 단순한 무심함이 아니라,

기대를 접는 방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시절, 닌텐도 게임기가 유행했다.

두 아들은 그걸 정말 갖고 싶어 했다. 아이들이 용돈을 오래 모아둔 게 있었고,

나는 “그래, 그 돈에 조금 보태서 사주자”라고 말했다.


포비는 반대했다. “너무 비싸다. 안 된다.”
결국 나는 포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주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포비는 사흘 동안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집 안의 공기가 ‘조용히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나는 억울했고, 포비는 상처받은 얼굴이었다.


그때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가 결핍을 다루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포비는 자신이 경험한 가난 때문에 더 인색해졌고,

아이들에게도 쉽게 풀어주지 못했다.
나는 내가 경험한 결핍 때문에, 오히려 과하게 주고 싶어졌다.


둘 다 ‘나름의 생존 방식’이었다.

둘 다 어느 지점에서는 조정이 필요했다.

적점을 찾는 일이 우리의 과제가 되었다.


함께한 지 30년이 다 되어간다.

지금 우리는 서로를 많이 맞춰가고 있다.

포비는 아이들이 어릴 때 자신의 방식에 대해 미안해하는 마음을 자주 말한다.
나 역시 포비를 이해하며,

포비가 쪼잔한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살아낼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포비는 여전히 내게 로또다.

도무지 맞질 않는다.

그런데도 내게는 가장 편한 비빌 언덕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만만함’이 아니다.

내게 만만함은,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함이다.

나는 늘 모두가 긴장의 대상이었고, 늘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필요했다. 내 마음이 무장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포비는 거창한 말 대신 작은 반복을 건넨다.

“아자아자.” 그리고 3,000원.


그 작은 반복이 쌓여 오늘의 내가 된다.

포비는 늘 그래왔다. 한결같고 성실하게, 내 곁에 있었다.

숱한 위기가 있었지만, 어쩌면 그 성실함이 지금의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안다. 사랑은 크게 증명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작게 계속되는 것이라는 걸.


그 3,000원에는 오늘도 내 편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