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있던 자리-
그렇게 너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송은영
회색빛 시멘트로 서 있는 너의 뒷모습에
살포시 내 손을 얹었을 때
전해오는 그 뜨거움은
한 여름의 강렬한 햇빛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다.
그것은 40년이 지나 널 만난 내 마음의 온도였다.
오랜 시간 간절히 날 기다렸다고 말해주는
나를 향한 너의 뜨거운 환대의 몸 짓이었을 거다.
너와 함께 한 기억들이 마술처럼 풀려버리던 그 순간
아빠 등에 업혀 새벽 공기를 느끼며 대문을 나서던 행복한 어린 나를,
아빠가 늦으시는 날이면
좁은 마루에 쪼그리고 앉아 밤하늘의 별을 보며
나지막이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를 달래던 외로운 나를,
새엄마의 냉소적인 눈빛과 이유 모를 학대를 받아내며
두려워했던 슬픈 나를,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시간들을 오롯이 견뎌낸
용감하고 기특하기 그지없는 어린 나를 다시 만났다.
어느덧 쉰을 바라보는 중년이 되어 돌아온 내게
나조차도 까마득히 잊어버린 시간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고,
너는 그 모진 세월 이렇게 잘 버티고 있었다고,
너를 떠난 나를 늘 응원하며
너 역시 버티라고
행복하라고
살아내라고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었구나.
내가 백발이 되어 널 다시 만나러 오게 된다면
그때도 지금처럼 날 환대해 주길 나는 바라본다.
1년에 한 번, 여름이면
친부의 기일에 맞춰 언니와 함께 남원에 있는 납골당에 간다.
그곳에서 나는 양아빠와 친아빠, 그리고 엄마를 한 번에 만나고 돌아온다.
그날도 납골당에 가기 위해 모처럼 고향 남원에 갔다.
외삼촌이 남원에 식당을 개업하셔서 인사차 들렀는데,
마침 그 식당이 내가 어릴 적 살던 동네 근처였다.
삼촌 식당 바로 옆에는 동네 슈퍼가 있었다.
어릴 적 입양된 집에서 살 때,
담배를 사 오라거나 잔돈을 바꾸러 오라고
부모님들이 자주 심부름을 시키던 곳이다.
놀랍게도 그 슈퍼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주인아주머니는 이제 연세가 지극한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모처럼 그 집 아주머니 딸들의 소식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 동네에서 세 번째로 이사했던 집은
이제 스타벅스가 들어온다며 공사 중이었다.
언니와 점심을 먹고
잠시 다녀오겠다고 말한 뒤,
나는 혼자 골목길로 들어섰다.
세 살 때부터
결혼을 하며 남원을 떠나기까지,
내 모든 시절의 기억이 남아 있는 곳.
나는 그렇게,
내가 살았던 시간을 마주하러 갔다.
골목길을 걷다
아빠와 단둘이 살던 셋방살이 집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발걸음이 멈췄다.
나는 그 집 담벼락에 손을 얹고
잠시 과거로 돌아갔다.
대문 밖 골목길은
그 시절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느껴졌는데,
어른이 된 지금의 내 눈에는
짧기 그지없는 길이었다.
아빠에게 떼를 쓰다
기둥에 묶여 매를 맞을까 봐
도망치듯 헤매던 그 골목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온 것 같아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억들,
내가 살아낸 삶의 자리와 흔적 앞에서
나는 조용히
한 줄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