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이름은 윤영순이었다.>

봄날은 간다

by 송은영


연분홍 치마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엄마.
집에 불이 나서 사진이 모두 타버리고, 유일하게 남은 사진 한 장.
막내 이모의 결혼식날 찍은 가족사진 속에서
나는 겨우 엄마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지금의 나보다 더 어린 나이였을 것이다.
딸 하나 남의 집에 보내고 살아가느라
제대로 웃어보지도 못했을 엄마가
그날만큼은 어색하게, 그러나 애써 웃고 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나는 이사진을 본 뒤 <봄날은 간다>라는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다.

엄마의 봄날이 이렇게 빨리 갈 거라는 걸 미처 몰랐다.



가까스로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교 3학년, 추석 이튿날 아침이었다.
광주 자취방 문을 두드리던 친구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은영아, 네 엄마가… 돌아가셨어.”

순간, 나는 어떤 엄마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양아빠와 함께 산 지 10년이 된 새엄마와 살고 있었다.
“어떤 엄마?”
“친엄마 말이야.”

그제야 숨이 멎었다.
추석날 아침, 통화만 했던 그 엄마.
1년 전 얼굴을 마지막으로,
아직 한 번도 ‘엄마’라고 불러보지 못했던,

만나면 늘 ‘저기요…’ 하고 불렀던 그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엄마는 얼마 안 되는 몇 번의 만남에서 항상 나를 ‘아가야’라고 하셨다.
엄마 눈에는, 여전히 내가 입양 보낼 때 그 ‘아가’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친구 손에 이끌려 남원으로 내려갔다.
엄마는 추석을 보내고 안양으로 식당일을 하러 올라가던 길에
터미널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하셨다고 했다.

그날 전화를 하지 말고
직접 찾아갔더라면 어땠을까.
후회는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자꾸만 후회하게 된다.


그렇게 21년 만에 처음으로 친척들을 만났다.
그것도 장례식장에서였다.

남원에 살고 있던 양아빠의 가족들에게 사실이 알려질까 봐
나는 장례식장 구석에 숨듯 앉아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조차 쉽게 알릴 수 없어
가까운 친구 몇 명에게만 연락을 하고 장례를 치렀다.

그때.. 참 많이 외로웠다.
‘여긴 어디지? 나는 누구지?’
그 말이 정말 내 얘기 같았다.


엄마를 부르며 서럽게 우는 언니와 동생이 부러웠다.
나는 목구멍에서 꽉 막혀 입 밖으로 엄마라는 말이 절대 나오질 않았다.
몇 번의 새엄마에게는 그렇게도 자연스럽게 불렀던
그 ‘엄마’라는 말을,
왜 정작 친엄마에게는 한 번도 부르지 못했을까.

한 달 후에 드디어 새 아파트에서 살게 될 거라 들었는데,
그렇게 고생만 하다 떠나셨다…
억울하다는 듯 술잔을 기울이며 오열하던 언니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아이고, 이제 나랑 미라는 어떻게 살라고… 어떻게 살라고…”

아빠도, 오빠도 제 역할을 못 한 세월이었으니
언니에겐 엄마와 자식 같은 동생 미라가
세상의 전부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언니가 말한 그 한마디 — “나랑 미라는…” —
그 말이 서운하게 들렸다.

그 와중에도 소외감을 느끼는 내 마음이
참 한심했지만, 그 서운함은 어쩔 수 없었다.


21년 만에 입양 보냈던 딸이 돌아왔다며
나는 장례식장의 ‘화제’가 되었다.
난생처음 보는 친척들이 돌아가며 말했다.
“내가 고모다.” “내가 이모다.” “내가 사촌오빠다.” “내가 사촌언니다.”
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 시간을 버텼다.
그날 내게 주어진 그 시간, 그 자리를
온몸으로 견뎌야 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사기죄로 지명수배 중이던 친아빠는
엄마 장례식장에 오자마자 경찰서에 붙잡혀 갔다.
엄마의 조의금으로 아빠를 빼내오고서야
장례를 마칠 수 있었다.

엄마는 살아서도 아빠가 벌인 일의 뒷수습을 도맡았고,
죽어서도 그 일을 하신 셈이었다.
정말 끝까지… 망자의 돈까지 다 가져간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미움은 들지 않았다.
미워한다는 건 아직 감정이 남아 있을 때 가능한 일인데,
나는 이미 아빠에게 감정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엄마의 관이 땅에 묻히던 그날,
아빠가 엄마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윤영순… 잘 가라. 고생 많았다. 윤영순, 잘 가라.”

그제야 알았다.
내 엄마 이름이 ‘윤영순’이었다는 것을.

그전까지 나는 엄마 이름이 궁금하지 않았다.
엄마는 그냥 ‘엄마’인 줄만 알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날,
동생 미라는 장례차 안에서 창밖을 보며 울었다.

“아이고… 우리 엄마 간다고 하늘도 슬픈가 우네…”

그 말이 가슴에 깊이 박혔다.
그 뒤로 비가 오면
늘 누군가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듯 느껴졌다.

아마 내가 비를 슬퍼하는 이유는,
엄마와 헤어지던 날 비가 와서가 아니라,
엄마가 하늘나라로 가시던 날
비가 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엄마가 일하던 안양 식당의 사장님 내외와
엄마의 교회 목사님이 조문을 오셨다.
그때서야 나는
엄마가 교회를 다니셨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엄마는 식당 주방에서 일하셨고
음식을 정말 잘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맛을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
엄마를 처음 만났던 날의 그 한 끼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양아빠와의 의리를 지키겠다는
내 어리석은 결심 때문에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놓쳤다.
엄마와의 시간, 미라와의 시간,
그 모든 소중한 순간들을.
그러면서도 그 의리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마가 살아 계신다면 뭘 하고 싶을까?’
잠잠히 생각해 보았다.
햇살이 따뜻한 오후,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워서 수다 떨다 잠들고 싶다.
엄마는 투박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겠지.
그리고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시겠지.'
그때야 비로소
나는 아주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엄마와 단 하루라도 함께했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천국에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겠지만
살아 계실 때 내 마음을
직접 전해드리지 못한 것이 자꾸 아프다.


언젠가 드라마에서 이런 대화를 들은 적이 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더 이상 볼 수 없을 땐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사람과 행복했던 시간을 기억해.
그 기억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어.”


그날 나는 메모장에 이렇게 적었다.

“행복했던 기억이 없는 사람이 보고 싶을 땐 어떻게 하지?”

그리고 스스로에게 답했다.

“그러니까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과
더 많은 행복한 추억을 쌓아야 하는 거야.
언젠가 볼 수 없을 날을 대비해서.”


하지만 그 대답이
온전히 위로가 되진 않았다.


엄마는 식당의 좁은 방 한편에서 사셨다고 했다.
얼마 전부터 사장님 내외의 전도로 교회를 다니셨는데
그 후로 단 한 번도 새벽예배를 빠진 적이 없으셨다고 한다.

목사님은 말했다.
“어머니가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우셨는지 모릅니다.
따님이 신학교를 다닌다고 늘 자랑하셨어요.
‘우리 은영이가 기도해서 내가 교회를 다니게 됐다’고요.”

나는 엄마를 위해 기도한 적이 없었다.
늘 혼자 믿음을 지키는 게 버거웠고,
부모님이 교회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런데 나를 위해 기도하는 분이 있었다니.
그것도 내 엄마였다니.


엄마가 너무 착해서, 너무 안쓰러워서
하나님이 더 이상 세상에서 고생하지 말라고
빨리 데려가셨을지도 모른다는 사람들의 위로의 말이
그날만큼은 정말 믿어졌다.



장례가 끝난 후,
엄마의 짐을 정리하던 언니는
또다시 오열했다.
안양 식당 사장님이 챙겨 오신 보따리 속엔
낡은 옷 몇 벌, 오래된 속옷 몇 개뿐이었다.

“이게 뭐야… 엄마…
어떻게 엄마 물건이 이게 다야…
어떻게 이렇게 살았는데…”

엄마의 영정사진을 끌어안은 언니를
나는 말없이 안았다.
그 울음에 나도 소리 없이 울었다.


엄마를 그렇게 보내고,
나는 다시 광주의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책상 위엔 여전히 펴둔 교재가 있었고,
창밖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햇살이 비쳤다.

주말이 되어 여느 때처럼 남원으로 내려갔다.


그 집에서 나는 울 수 없었다.
입양된 집의 공기 속에서
나의 슬픔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잃은 마음을 고요히 접어
가슴 깊숙이 얼려두었다.
얼음처럼 투명하고,
깨질까 봐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늘 그래왔던 것처럼,
세상에 섞여 살아내야 했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