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간 자리마다 나는 자랐다”
오양 이모가 떠난 뒤에도 아빠는 자주 새로운 이모들을 데려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이번에도 나는 살아남아야 해.’
어떻게 하면 새 이모에게 미움을 받지 않고,
조금이라도 예뻐 보일 수 있을지
아이였던 나는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잘해도
그 이모들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도시락을 싸야 했다.
아빠는 매번 식당에서 돈가스를 사서 학교로 가져다주셨다.
그 시절 돈가스는 아무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친구들은 그런 나를 부러워했지만
나는 오히려 친구들이 싸 온
멸치조림, 콩자반, 김치가 든 도시락이 부러웠다.
몰래 도시락을 바꿔 먹으며
그 소박한 밥맛에서 이상한 위로를 느꼈다.
아빠는 내가 자랄수록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느끼셨는지,
아니면 아빠 자신이 외로웠는지
이번에는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한 분을 집으로 데려오셨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작은 대폿집을 하시던, 부산 출신의 경상도 여자분이었다.
웃픈 일이다.
서울엄마는 서울, 오양이모는 전라도 광주,
이번 엄마는 경상도 부산.
‘우리 아빠는 전국구였구나’
그땐 그렇게 웃었지만, 사실은 울지 않기 위한 웃음이었다.
나는 이미 지쳐 있었다.
‘어차피 또 떠날 거잖아.’
그런 마음으로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새벽,
부엌에서 엄마가 노래를 부르셨다.
“그때 그 사람…”
처음 듣는 노래였는데
그 구슬프고도 처연한 멜로디가 이상하게 내 마음을 울렸다.
그날 이후 그 노래는 내 18번이 되었고,
나도 모르게 그 엄마에게 마음을 열었다.
엄마 역시 처음엔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임신을 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당황스러웠다.
‘이제 엄마는 나보다 아기를 더 사랑하겠지.’
이미 내가 입양된 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 불안은 더 깊었다.
6학년 때 여동생이 태어났다.
아빠를 닮은, 참 예쁜 아기였다.
나는 아빠와 닮은 동생이 부러웠다.
아빠와 닮은 것은 내 허벅지의 작은 점 하나뿐이었으니까.
엄마는 젖이 잘 나오지 않아 고생하셨다.
그때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일이 있었다.
아빠가 내게 말했다.
“은영아, 네가 좀 엄마 젖을 빨아봐라. 그래야 젖이 잘 나올 거야.”
너무나 사랑하는 아빠의 말이었지만
그 부탁만큼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거부할 수 없었던 나는 결국 그 일을 했다.
입안에 번지는 비릿한 맛,
구역질이 올라왔지만 꾹 참고 견뎠다.
그날 이후, 나는 처음으로
아빠를 원망했다.
학교가 끝나면 동생을 돌보는 일은 내 몫이었다.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도 동생을 데리고 가야 했다.
그 일이 버거웠지만,
동생을 잘 돌보면 엄마가 나를 더 사랑해 준다는 걸
어느새 알고 있었다.
동생이 생긴 뒤로 새엄마는 떠나지 않았다.
내가 결혼할 때까지,
그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 머문 ‘엄마’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엄마는 나와 동생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차라리 대놓고 화를 내거나 야단을 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무엇이라 말하기 힘든 냉소적인 표정과 말투는
사람을 조용히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것은 직접적인 폭력보다 더 깊숙이 파고드는,
서늘한 상처였다.
그럴수록 나는 더더욱 엄마 편이었다.
‘남의 자식을 거두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 마음을 이해하고 싶었다.
자기 자식 맘 놓고 예뻐할 수도 없는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게다가 끊임없이 여자 문제로 엄마를 힘들게 했던 아빠와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엄마를 ‘엄마’가 아닌,
한 여자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학창 시절의 나는 그리 특별한 일에 행복해하지 않았다.
내가 진심으로 행복했던 날은, 아주 사소한 날들이었다.
중·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아침도, 도시락도 스스로 챙겼다.
엄마는 늘 늦게 일어나셨고,
그건 언제부턴가 내 몫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시골에서 남원으로 올라와 자취를 하던 친구들도
다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 그게 특별히 고생스럽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데 ‘엄마가 있음에도 혼자 준비해야 하는 아침’
그 기분은 어쩐지 조금 쓸쓸했다.
그러다 가끔, 정말 가끔
엄마가 먼저 일어나 밥을 차려주시고 도시락을 싸주실 때가 있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마음이 따뜻했다.
그것만으로도 세상이 조금은 덜 외로워졌다.
그때 알았다.
내게 너무도 평범해 보이는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바라는 하루일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