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는 잘못이 없어요"
난 아빠와 단둘이 살아도 싫지 않았다.
아빠의 넓은 등으로 충분했고, 아빠의 사랑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아빠에게 나는 충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빠와 단둘이 살던 어느 날, 아빠는 점점 엄마의 손길이 필요해 보였다.
그 무렵 내게 새엄마가 생겼다.
성이 ‘오’씨였고, 처음에는 오양 이모라고 불렀다.
아빠와는 나이 차이가 많았고,
정상적인 만남이라기보다 다방에서 일하던 분이었다고 기억한다.
약간 살집이 있고, 광주 사투리가 강했으며, 무엇보다 무서운 사람이었다.
아빠가 계실 땐 무척 친절했지만,
아빠가 나가시기만 하면 얼굴이 금세 달라졌다.
욕을 하고, 꼬집고, 때리고, 눈빛이 바뀌었다.
그때 나는 신데렐라나 장화홍련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이건 내 운명인가 보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버텼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아빠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그건, 당해본 사람만 아는 또 다른 공포였다.
이제 쉰이 된 지금도 가끔,
내 안에서 여전히 눈치를 보는 아이를 만난다.
그 아이는 여전히 누군가의 표정과 목소리를 살핀다.
그것이 신체적 학대이든, 정서적 학대이든,
학대를 경험한 사람은 비슷한 눈빛, 말투, 분위기를 마주치면
순간, 흐르던 피가 멈추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아빠와 함께 밥을 먹을 때면
‘가게에 나가실 때 나도 데려가 주세요.’
그런 마음을 눈빛으로 보냈지만
아빠는 그 신호를 받지 못하셨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어느새 체념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그 상황에 내어주게 되는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친엄마로 알았던
서울엄마가 그리웠다.
하지만 소리 내어 울면 더 혼났기에
나는 일찍이 ‘무음으로 우는 법’을 배웠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옷소매를 물고,
아무리 울어도 목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게 숨죽여 울었다.
그때 덮었던 빨간 밍크이불,
그리고 아빠, 새엄마, 나 셋이 누워 자던 단칸방의 공기까지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은 다행히,
숨죽여 울지 않아도 되고,
안겨서 울면 다독여주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안다.
그런 시간을 버티던 어느 날, 군에 갔던 오빠가 제대하고 돌아왔다.
오빠는 아빠의 두 번째 동거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내가 아빠에게 입양되어 왔을 때,
오빠는 고등학생이었고 내 기저귀를 빨아준 적도 있다고 했다.
오빠가 군에 입대할 때 나는 울며 매달렸고,
그런 나 때문에 오빠도 함께 울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 오빠도 친엄마 없이 자라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큰오빠, 큰언니, 둘째 오빠 모두
제대로 돌봄 받지 못한 채 자란 것 같다.
아빠 역시 그들에게 따뜻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왜 유독 나에게만 그토록 따뜻했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오빠는 친오빠는 아니었지만, 내게는 흑기사 같은 존재였다.
새엄마와 나이 차이도 크지 않았다.
오빠는 오양이모가 나를 괴롭히는 걸 알고 있었고,
둘 사이의 갈등은 점점 깊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오양이모가 병원에 실려갔다.
오빠와 크게 다투고 나서 쥐약을 먹은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어린 나는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끔찍하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양이모는 살았다.
하지만 약물 후유증으로 말이 어눌해졌다.
그날 밤,
아빠가 보고 싶고 걱정되어 혼자 병원을 찾아갔다가
나는 내 생애 가장 슬픈 장면을 보았다.
오양이모의 오빠라는 남자가
아빠의 뺨을 때리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계단 모퉁이에서 그 모습을 본 나는
몸을 숨긴 채 숨을 죽였다.
아빤 고개를 숙이고 연신 “죄송합니다”만 반복하셨다.
아빠보다 훨씬 어린 사람 앞에서 말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하늘을 향해 수없이 외쳤다.
“우리 아빠는 잘못이 없어요!
우리 아빠 잘못이 아니에요!”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나는 그저 작고 힘없는 아이였다.
그때 아빠를 지켜주지 못한 자책감과 분노가
어린 가슴을 찢었다.
두 주먹을 꼭 쥐고, 정신없이 달렸다.
그 뒤 오양이모는 결국 아빠 곁을 떠났다.
그때 나는 알았다.
모든 이별이 슬픈 건 아니라는 걸.
때로는 다행스러운 이별도 있다는 걸.
그것이 내가 초등학교 1학년쯤 겪었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