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있어 내 인생에 봄이 있었습니다.>

그 품 안에 봄이 있었다

by 송은영





서울엄마가 떠난 뒤 나는 아빠와 단둘이 살았다.
새벽에 눈을 떴는데 아빠가 보이지 않아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행히 아빠는 대문 앞에서 가게에 나갈 채비를 하고 계셨다.

“나도 갈래.” 하자 아빠는 쪼그려 앉아 내게 어부바를 해주셨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지만 아빠의 등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담요 같았다.
발이 시리다 싶을 때면 아빠는 한 손으로 나를 받치고, 다른 손으로 내 발을 만져주셨다. 번갈아가며 내 발을 데워주던 그 손의 온기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모두가 나를 못난이라고 부를 때,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말해준 단 한 사람 — 우리 아빠였다.

아빤 어디를 가든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자전거 뒤에 서서 어깨를 짚고 동네를 구경하던 일,
오토바이를 타고 지리산 자락을 오르던 날들.
아빤 단 한 번도 나를 귀찮아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저 ‘아빠 껌딱지’였다.


우리 집 바로 앞에는 ‘청월장’이라는 큰 요정집이 있었다.
밤에는 한복 입은 이모들이 웃음을 팔았지만, 낮에는 내가 친구 소영이와 놀 수 있는 놀이터가 되었다.
요정집주인인 소영이 엄마는 나를 구박하지 않았다.

“숟가락 하나 더 얹으면 된다”며 딸처럼 밥을 먹여주셨다.
그곳에서 나는 이모들의 세상과 노래를 배웠다.
그래서일까. 나는 동요보다 성인가요를 먼저 배웠고, 어린 마음에도 그 노래들이 이상하게 가슴을 울렸다.
숟가락을 마이크 삼아 거울 앞에서 노래 부르며 ‘가수가 되는 꿈’을 꾸던 아이, 그게 나였다.


넉넉하지 않았지만 아빤 늘 이웃을 먹이고 거두는 사람이었다.
“은영아, 남자는 저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나는 그런 줄만 알고 자랐다.
아빤 세상 누구보다 의리 있는 분이었고, 어쩌면 그런 아빠에게 나도 의리를 배웠나 보다.

나는 늘 그 손을 잡고 살았다.

아빠랑 나랑 잠잘 때마다 아빠는 내 허벅지에 있는 점을 보며

아빠 허벅지에도 똑같이 점이 있다고 보여주었다
아빠는 내 허벅지의 점을 가리키며 “은영이 누구 딸이야?” 하셨다.
나는 늘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빠 딸!” 하고 대답했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건 아빠가 나에게 ‘넌 내 딸이야’라며 스스로 다짐하던 주문 같았다.

아마도 아빠는 나의 허벅지와 아빠의 허벅지의 그 점을 보며 우리는 운명이라고 여기셨을지도 모른다.


훗날 들었다.
아빠는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태어나,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동생들을 돌보며 살았다.
결혼도 세 번 하셨다고 했다.
그중 셋째 부인이 바로 나를 입양했던 ‘서울엄마’였다.

내가 결혼을 하고 난 뒤, 서울엄마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강원도 원주로 찾아가 다시 뵈었다.
엄마는 여전히 아름다우셨다.
이미 다른 분과 가정을 꾸리고 계셨고,
양아빠가 돌아가신 뒤에야 나는 용기를 내어 찾아간 것이었다.

엄마는 그날, 조심스레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네 아빠가 날 참 많이 쫓아다녔어.
결혼 안 해주면 죽겠다고 하길래 결국 결혼을 했지.
그런데 알고 보니 이미 자식도 있고,
혼인신고만 안 했을 뿐 부인이 둘이나 있었더라.
나는 네 아빠 때문에 아이를 더는 낳을 수 없게 됐어.
그래도 애 하나는 키워보고 싶어서 널 데려왔지.
백일상도, 돌상도 내가 다 차려줬어.
그런데 도저히 그 사람과는 못 살겠더라.
그래서 서울로 올라가 자리를 잡으면 널 데리러 오려고 했지.
몇 년 뒤, 약속대로 널 데리러 갔는데
네 아빠가 죽어도 못 준다고 버티는 거야.
택시를 세워놓고, 너를 사이에 두고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 널 데려오지 못했어.
교복 입은 아이들을 보면 네 생각이 났고,
너 때문에 나도 많이 울었다…”


함께 간 남편께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은영이, 많이 사랑해 주세요.
불쌍한 애예요…”


서울엄마는 그 뒤로 자식 없이 지내시다,
지금의 남편분과 함께 형님이 낳은 아이를 입양해 키우고 계셨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은영아, 생각하기 나름이야.
너는 복이 많은 아이야.
남들은 아빠가 하나인데, 너는 둘이잖니.
엄마도 둘이고.
다 너를 사랑했던 분들이야.”


가만히 곱씹어보니 그 말이 맞았다.
서로 못 키우겠다고 싸운 게 아니라,
서로 품으려 다투었던 인생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소방관 야유회에서 노래 부르는 아빠>

아빠는 소방관이셨다. 어느 날 나를 업고 화재 현장에 간 적이 있는데 동료가 나를 고아원에 보내라고 한 말에 그 동료랑 크게 싸우시고 그 뒤로 소방관복을 벗었다고 했다.
그 후 시작한 일이 ‘건강원’이었다.
뱀탕을 끓이던 그 시절, 돈은 많이 벌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늘 그를 ‘정 많은 사나이’라 불렀다.
아빠는 따로 가게가 없어서 직접 가정에 방문해 약을 다려주셨다.

그렇게 약을 다리러 다닐 때마다 나를 업고 다녔다.
버스 안에서 내가 토하고 울어도, 그 손으로 꼭 안고 다니던 아빠였다.


동네 어른들은 늘 말했다.
“은영아, 네 머리털로 네 아버지 신을 짜도 모자라다.
심봉사가 따로 없다. 네 아빠한테 정말 잘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동냥젖까지는 아니었지만 이 집 저 집 다니며 밥은 먹이신 것 같다.

남자가 밥해먹이기는 좀 어려웠을 테니깐..

그래서 아빠는 돈이 좀 생기고 나서 동네분들에게 그렇게 밥을 자주 사드렸나 보다.

나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심봉사 딸이 되어 있었고

앞으로 반드시 심청이가 되어야 하는 운명을 안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