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은 늘 눈보라를 품고 있었다. >

봄빛 아래 겨울

by 송은영

입양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냥 받아들였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날 이후, 내 세상은 조금 달라졌다.

비록 새엄마들에게 구박을 받았지만, 아빠의 사랑 덕분에 나는 어디서든 기죽지 않고,

야무지고 당찬 아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런데 입양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나는 점점 자신감을 잃었다.
아빤 여전히 그 자리에 계셨지만, 나는 달라졌다.
예전처럼 당당하게 다가갈 수 없었고, 필요한 것이 있어도 쉽게 말할 수 없었다.
수업료 통지서를 품에 넣은 채 며칠을 끓이다가 결국 늦게 내밀고는 야단을 맞곤 했다.
아빠와 가족들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스스로 포기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수학여행을 가지 않은 것도 그랬다.

반장이었지만 가지 않았다.
겉으론 ‘사순절이라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사실 그 경비가 부담스러웠다.
아빤 분명 어떻게든 보내주셨겠지만, 나는 미리 포기하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예전처럼 떼를 쓰거나 당당할 수 없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거리감이 생겼다.
친아빠와 양아빠 사이에는 설명하기 힘든 미묘한 차이가 있었고,
그 차이가 나를 눈치 많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빠는 내 인생의 봄이었지만,
언제나 봄이기만 한 계절은 없었다.


어느 날, 아빠가 이발소 이모와 바람이 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그분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제발 우리 아빠 만나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려요.”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빠는 나를 불러 사정없이 뺨을 때리셨다.
“고생해서 키워놨더니, 버르장머리 없이 어른 일에 끼어?”
그날의 아빠는 너무 낯설고 냉정했다.
매보다 그 말이, 그 눈빛이 더 아팠다.

나는 그때, 엄마를 ‘엄마’가 아닌 한 여자로 보았다.
안쓰럽고 지켜주고 싶은 여자.
그런데도 이상하게, 아빠를 미워할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 아빠에게 매를 맞을 뻔했던 기억조차도 희미했다.

내가 여섯 살이던 어느 날이었다.
무슨 일로 아빠를 화나게 했는지 모르지만, 그날 아빠는 내 옷을 다 벗기고
집 기둥에 묶어 두셨다. 매를 찾으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옆집 아주머니가 나를 풀어주었다.
나는 창피한지도 모르고 그 길로 골목을 미친 듯이 달렸다.
해 질 녘이 되어 조심스레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두려움보다 더 큰 건, 여전히 아빠가 무서우면서도 보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그날의 공포는 오래 남았지만, 나는 그 기억마저 희미하게 덮었다.
‘아빠는 나를 사랑했다.’
그 믿음 하나로 나는 그 모든 장면을 덮어버렸다.


아빠와 엄마는 자주 싸우셨다.
한쪽에서는 욕설이, 다른 한쪽에서는 울음이 섞여 들려왔다.
밤이면 나는 동생 손을 잡고 교회로 피신했다.
기도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다음날이면 엄마 얼굴에 멍이 들어 있었고,
며칠 뒤에는 집 안에 없던 살림살이가 하나씩 생겼다.
아빠는 그렇게 미안함을 달래셨던 것 같다. 다행인 건
엄마는 떠나지 않았다. 떠날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엄마가 그렇게라도 곁에 있어주길 간절히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늘 불안했다. 언제 또 폭풍이 올지 몰랐으니까.


아빠는 내 인생의 봄이었지만,

그 봄엔 늘 눈보라가 섞여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 어떤 잘못도 쉽게 용서할 수 있었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고 믿었다.
친엄마도, 새엄마도, 양아빠도, 모두 사정이 있을 거라고.

하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만은 단 한 번도 그렇게 관대하지 못했다.
내게는 언제나 엄격했고, 냉정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시절을 견딜 수 없었으니까.

내가 나에게 관대해지는 순간 나는 망가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를 단속하며 사는 게 오히려 더 편했다.


양아빠와 새엄마의 관계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아빠는 뇌경색으로 두 번이나 쓰러지셨고, 한쪽 몸이 마비되어 오랜 시간 누워 지내셨다.

그 무렵부터 아빠의 의처증은 점점 심해졌고, 새벽예배에 다녀오는 엄마를 의심하기 시작하셨다.

지친 엄마는 “이 세상에 하나님 같은 건 없어.”라고 중얼거리며, 끝내 신앙을 버리셨다.

그렇게 엄마는 서서히, 아주 느리게 무너져 갔다.

결국 두 분은 이혼했다.
법적 서류보다 마음의 이별이 먼저였다.
내가 기억하는 17년의 시간은 전쟁 같았다.
그 속에서 나는 늘 피신하듯 기도했고,
불안한 평화를 일상처럼 견뎠다.

그래도 아빠는 여전히 내 인생의 봄이었다.
다만 그 봄엔 눈보라가 섞여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봄과 겨울을 함께 품은 아빠를 사랑하며 자랐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