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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미 Mar 10. 2022

내가 일하는 공간은

주부와 공간에 대한 생각

어릴  부모의 직업을 써서 제출하는 일이 학기 초마다 있었다. 아이의 인적사항에 부모의 직업이  빠지지 않고 들어갔는지 의문이지만 말이다. 그때마다 엄마에게 엄마의 직업을 무엇이라고 적어야 하는지 물어봤다.     


“엄마~ 직업란에 뭐라고 써야 해?”

“엄마는 주부라고 적어~”     


“주부가 뭐야?”

아마 저학년이었던 것 같다. 주부라는 단어의 뜻을 몰라 물어봤다.


“집에서 너희들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돌봐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야.”

엄마는 무심하게 대답해줬다.     


‘아~ 주부는 집에서 밥해주고 빨래하고 돌보는 사람이구나. 우리 엄마가 하는 일이랑 딱 맞네.’

나는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엄마의 직업은 주부라고 적어 갔다.


주부라는 존재가 가정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엄마가 며칠이라도 집을 비우게 된다면 온 식구 밥 먹는 일부터 옷 입는 것까지 난리가 난다는 것만 몸소 느꼈다. 해도 해도 티가 안 나지만 안 하면 크게 티가 나는 것이 바로 집안일이었다. 그 집안일을 묵묵하게 감당해 온 것은 바로 ‘주부’인 엄마였다.     


학년이 조금씩 올라감에 따라 엄마의 직업란을 ‘주부’라고 적으며 나는 생각했다.

‘나중에 커서 나는 직업란에 뭐라고 쓰지?’ 이런 생각을 하며 끝내 도달하는 것은 적어도 주부라고 쓰지는 말아야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주부’보다 더 멋있는 일을 하며 살아야지.. 하는 그런 것 말이다.

     

지금 나의 직업은 ‘주부’다. 불현듯 어린 시절의 내가, 젊었던 엄마가 생각난다. 여자로 태어나서 엄마가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엄마는 나의 엄마가 되기로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런 환경 가운데 주부로 살며 알뜰살뜰 집안을 돌보았다. 어느새 그때 엄마의 모습처럼 커버린 나는 집안을 살피는 ‘주부’가 되었다.    

  

주부인 나의 일하는 공간은 바로 우리 가족이 사는 ‘집’이다. 어느 정도의 경력과 능력을 갖춘 주부인지 질문을 받는다면 하루하루 간신히 끼니 맞춰 가족들 밥해 먹이고, 너무 심각하게 난장판이 되지 않는 이상 청소기 한번 잘 밀지 않는 주부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주부가 된 지 9년이나 되었지만 아직 레벨이 그리 높아지진 않았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해내는 다양한 가사와 육아는 ‘주부’가 된 나의 주 업무이다. 그러나 몸 바쳐 일하진 않는다. 어린 시절 엄마가 해내던 ‘주부’와는 스타일이 좀 다르다. 나는 나 자신도 소중하게 여기는 ‘주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부인 내가 일하는 집에는 나의 공간도 있다. 어린아이들도, 남편도 각자의 방이 있지만 나에게 네모난 방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주방 한편에 더 크고 멋지게 나만의 공간을 만들었다. 하얀색 바탕의 책상과 짙은 오크색의 책장, 애지중지 하는 노트북과 스탠드까지 오로지 나만을 위해 갖추어 놓았다. 이 공간에서 나는 된장찌개 끓이다가 잠시 앉아서 책 읽고, 아이들에게 줄 과일 씻다가 앉아서 키보드를 두드린다.      


‘주부’라는 직업은 나를 ‘집’에 머물게 했지만, 내가 일하는 공간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이곳에서 나는 가족들도 두루 살피며 나 또한 성장해간다.

이 공간은 나를 더 행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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