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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미 Mar 15. 2022

딸이 전해준 비밀 이야기

그렇게 표현하며 살거라

“엄마, 이건 비밀인데....”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온 딸이 슬금슬금 내 옆으로 오더니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비밀’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콩닥거리는데 우리 딸이!!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내 딸이!! 비밀 얘기를 한다며 다가오니 바운스 대는 심장을 가만히 두기 어려웠다. 괜스레 오버하는 반응을 보이면 딸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 엄마 잘 들을게~ 준비됐어~”

요동치는 심장과 아주 크게 대비되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있잖아, 오늘 내가 단우한테 초콜릿을 줬거든. 신발장에다 올려놔서 아무도 모르게 잘 전달했어.”

딸은 계속 내 귓속에 입김을 불어대며 비밀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이 녀석, 오늘 아침 등굣길에 나에게 궁금한 게 있다며 질문을 했었다. 

“엄마,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데, 아무도 모르게 주고 싶대. 어떤 방법이 좋을까? 나는 절대 아니야. 나 말고 다른 친구가~”

괜스레 자기라고 하면 부끄러울까 봐 다른 친구 핑계를 대며 이야기하는 수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구나. 큭큭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꼭 몰래 전해줘야 한 대? 그럼 사물함은 어떨까?” 

나도 타인에게 묘책을 찾아주는 듯 건조하게 대답했다.

“사물함에 넣기에는 내가 15번이고, 단우가 13번이니까 괜히 옆 옆칸을 여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어?”

자연스러운 취조에 넘어간 형사와 피의자의 대답처럼 딸아이는 술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전에 본인 이야기가 아니라고 못 박았던 것은 잊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사물함이 위험하면.. 책상 서랍은 어떨까?” 다시 새로운 방법을 일러줬다.

“책상 서랍에 넣는 것도 썩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은데~” 딸은 머리를 갸우뚱하며 고민했다. 그 사이 학교 정문 앞에 도착했고, 최후의 실행방법은 결정하지 못한 채 우리는 헤어졌다.   

  

아침 등굣길의 대화가 생각나면서 나는 딸의 비밀 이야기를 계속 이어 들었다. 

“엄마, 내가 수업 마치기 전에 화장실 다녀온다고 손 들고 잠깐 나갔거든. 그때 옷 주머니에 초콜릿을 넣어나갔어. 그리고 단우 신발장에다가 놓고 왔어.”

8살 아이의 계획치곤 제법 치밀했다.


“그런데 그걸 네가 줬다는 걸 단우가 어떻게 알아?” 

“내가 쪽지를 써서 붙였거든.” 

오호라, 쪽지까지? 뭐라고 썼을까 요즘 애청하는 드라마보다 더 궁금했다.

“뭐라고 썼는데~?”

“ [단우야 나랑 놀아줘서 고마워. 사랑해.]라고 썼어.”

그렇게 말하고는 의기양양하게 딸은 거실로 돌아갔다.     


오늘은 3월 14일 화이트데이다. 자고로 화이트데이는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사탕을 주는 날이라고, 사랑을 표현하는 날이라고 알고 있었건만!

우리 딸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친해진 자기 앞에 앉은 단우라는 남자 친구에게 마음을 표현했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 다른 동네로 어린이집을 다녔던 터라, 학교 근처의 우리가 사는 동네에는 딸의 친구가 없었다. 그렇게 아는 친구 하나 없이 입학한 초등학교에 같이 노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마음을 꽉 채웠을까, 그 고마움과 기쁨은 어디에도 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마운 마음, 사랑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세상에는 다양한 마음이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을 표현하며 사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나의 어린 시절만 봐도 그렇다. 마음은 절대 남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좋든 싫든 기쁘든 나쁘든 어느 감정이고 꾹 참고 잘 보여주지 않았다. 특히 가정에서는 더더욱 마음 나누는 법을 알지 못했고, 학교에서도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표현하기 어려워했다.      


이렇게 살아온 내가, 저렇게 표현을 하는 딸아이를 보자니 마음이 팡 부풀어 터질 것 같았다. 뜨거운 무언가가 계속 위로 올라왔다. 눈가가 뿌옇게 변하고 머리가 찌릿찌릿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었다.     


마음 하나 표현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렇게 살아왔니?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그저 머뭇거리며 변변찮은 대답만 할 것 같았다. 그런 나에게 자기감정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딸은 그렇게 살아오지 못한 내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과 같이 느껴졌다.     


나도 이제는 표현하며 살도록 노력하고 있다. 과거야 어쨌든 이제 내 품에는 사랑하는 두 아이가 폭 들어와 나를 따뜻하게 한다. 이 기운으로 다시 아이들을 포근히 품는다. 우리 딸의 오늘 일화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앞으로도 딸의 인생에 자유롭게 표현하며 마음을 주고받는 그런 생기 있는 삶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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