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의 서랍을 정리할 시간입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 곁에서 자주 들려오는 소식이 있습니다. 지인의 부모님이 알츠하이머 치매 진단을 받았다는 이야기.
예전에도 “노망이 들었다"라는 말을 듣곤 했지만, 그때의 ‘노망’은 병명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 괴팍해지거나 판단이 흐려졌을 때 건넸던 불평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치매라는 단어는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내가 아는 한 친구의 어머니는 젊은 시절 누구보다 아름답고 활기찬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치매가 시작되면서 남편을 의심하는 증상이 나타나 다정했던 부부가 서로를 지치게 했습니다.
남편은 집을 떠돌고, 자녀들은 마음 졸이며 어머니를 돌봐야 했지요. 삶이란 이렇게 예측할 수 없는 무력한 국면을 우리 앞에 놓습니다.
오늘 예배에서 목사님이 한 권의 책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김혜령 작가의 죽을 때까지 유쾌하게.
알츠하이머를 앓는 아버지를 지켜보며 쓴 편지 형식의 글 중 한 대목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만약에 엄마가 알츠하이머에 걸린다면,
치료법이 극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한
언젠가 너를 까맣게 잊어버리게 될지 몰라.
아마도 너무 슬프겠지.
그러나 기억의 능력만이 관계를
지속시키는 것은 아니지 않니.
네가 내 배 속에서 꿈틀대던 것도,
막 태어나서 새빨간 얼굴로 온몸에 힘을 주어
울던 것도...두 발로 일어나 첫 걸음마를 내딛던 것도,
처음으로 미끄럼틀을 혼자 타고 내려왔던 것도,
처음으로 연필을 잡고 그림을 그린 날도
너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잖니.
기억은 그렇게 한참 늦게 온단다.
그러니 기억이 빨리 사라지는 것도
그렇게 이상한 것은 아니야.
내가 너는 기억하지 못하는 시절을 기억하며
너를 나의 딸로 붙잡고 살 듯이,
너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게 될 시간을 기억하며
나를 너의 엄마로 붙잡고 살 수 있을 거야.
슬프겠지만, 그래도 죽을 때까지 유쾌하게!
나는 기억이 사라지고 취약함이 더해질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싶어. 그런 나의 길을 지켜보고 기억해 주지 않을래?
-<출처> 죽을 때까지 유쾌하게. - 제9장 '만약 내가 치매에 걸리거든' - 김혜령 작가-
이 구절을 읽으며 나는 ‘기억’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기억은 두 사람을 이어주는 끈과 같습니다.
내가 당신을 기억하는 끈, 그리고 당신이 나를 기억하는 끈.
어느 날 내가 붙잡고 있던 끈이 바람에 풀려나가더라도 당신의 마음속에서 나를 부르는 그 끈이 살아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기억한다는 그 단순한 일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새삼 느낍니다.
회사에서 한 번은 바이러스에 걸려 클라우드에 보관하던 소중한 파일들이 한순간에 사라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허탈함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그 파일들은 몇 년이 지나도 다시 열어보지 않을 것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머릿속에 간직한 수많은 기억도 어쩌면 비슷하지 않을까요?
중요하지 않은데도 꼭 잡고 있으려다 결국 우리를 짓누르는 노폐물이 되기도 합니다.
비워내지 못한 욕심이 쌓이면,
마치 스스로를 지우는 바이러스처럼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을 가리지 않고 함께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요?
삶은 생각보다 길지 않습니다.
임종의 순간을 상상해 보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간 세월 속에서 끝내 간직하고 싶은 기억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떠올릴 단 하나의 기억이 있다면,
아마도 누군가의 얼굴, 손의 온기,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일 것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억의 끈이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기억하는 끈,
당신이 나를 기억하는 끈.
이 두 가닥이 서로의 손끝에 잡혀 있다면
기억의 숨결은 필름처럼 천천히 흐릅니다.
설령 내가 당신을 잊어도
당신이 나를 기억한다면
그 한 줄기의 빛이 우리의 존재를 이어 줍니다.
기억—
이제 아름다운 기억만 남기고
나머지 파일은
조용히 정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이제, 남은 기억을 사랑으로 품고
쓸데없는 욕심의 파일을 비워낼 때,
우리는 비로소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의 이름을 오래도록 지켜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