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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by 가치지기

어제가 추분이라는 사실을 출장길 기차 안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유난히도 지독하고 지쳐버린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문턱을 넘어오면 꼭 나누고 싶었던 시가 있었는데, 하루 늦어 전합니다.


헤르만 헤세는 가을을 노래하는 듯 보이지만 그 계절 속에 삶과 죽음을 함께 수놓아 아름답고도 차가운 통찰을 담아냈습니다.


머지않아 바람이 불어오고

머지않아 죽임이 다가와 수확하리라.

머지않아 회색 유령이 와서 웃으면

우리 심장은 얼어붙고

정원도 그 화사함을, 생명도 그 빛을 잃으리라.

함께 노래하며 즐거워하자.

머지않아 우리는 먼지가 되리니.

– 헤르만 헤세, 「가을」 (1918)


언제부턴가 가을은 내게

날씨나 풍경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처럼 다가옵니다.



어제저녁, 집에 돌아와 아내를 앉혀놓고 나 자신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나는 나를 돌아보기 위해 수많은 책을 읽고, 내면을 조명하며 수없이 반성하며 살아왔다고 믿었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내가 놓지 못하는 것들,

붙들고 있는 무형의 집착들이

아무 말 없이 나의 마음을 눌러왔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했습니다.


“내려놓자. 비우자.”

몇 번이나 되뇌지만,

마음이라는 건 생각보다 복잡하고,

그리고 생각보다 비겁합니다.


나는 내 마음의 껍질을 한 겹 한 겹 벗겨내는 일에는 쉽게 지치면서도,

타인의 표정, 말투, 눈빛 하나에 온 신경을 쏟으며

나를 보호하려 애쓰는 생존 본능에는 끝없이 에너지를 씁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심코 던진 상처는 쉽게 잊으면서, 타인의 말 한마디에는 오랫동안 아파하고 서운해하는 그런 자기 연민이, 어쩌면 내 안에서 자라난 가장 비열한 본능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어떤 근원도 쉽게 밝히기 어려운 내면의 그림자와 마주할 때면,

‘중요한 건 조화로움이다’

‘사람들과 어울려야 삶에 의미가 있다’

이런 말들은 오히려 나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혼자 있을 때에야 비로소 나도, 타인도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나.


나는 아직도 ‘함께’라는 말에 서툰 중년의 사람입니다.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


백세까지 산다 해도, ‘언제까지’라는 명확한 시간표가 있다면 우리는 지금과 다르게 살 수 있을까요?


나이가 들어가면,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무너지고 약해지는 것들이 보입니다.

몸도, 마음도.


어느 날, 아버지께 여쭌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 전에는 주춤주춤 걸으시지 않으셨잖아요.

힘들지 않으세요?”


그때 아버지는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니야.

그냥… 그렇게 걸어지는 거야.”


그 말을 듣고 나서

‘아, 나도 언젠가 그렇게 걸을 날이 오겠구나’

잠시 생각에 잠긴 적이 있습니다.


가을은

그렇게 조용한 퇴화의 시작을

아무 말 없이 들려주는 계절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여유가 생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삶은 더 치열해지고,

사람을 더 경계하게 됩니다.


어느새 과거의 공로는 잊히고,

매일이 새로운 생존을 위한 전장이 되어

한 걸음 한 걸음이 버티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젊은 날 그렇게까지 애쓰지 말걸 그랬습니다.


젊은 나에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다.

체력을 아껴둬야

끝까지 걸을 수 있다.”




사는 게 그렇습니다.

버티고 버티다 보면

막상 쉴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마음도, 입맛도, 감각도

무뎌져 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평화를 얻지만,

그 평화는 너무 늦게 찾아온 것 같아

어딘가 모르게 쓸쓸합니다.


어제 문득,

남은 삶에서 단 하나,

욕심내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그때 우연히 마주한 글귀.

법정 스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영혼을 맑게 혹은 아름답게 가꾸는 것,
이것이 본질입니다."


아,

이거였구나.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래도록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


더 많이 가지려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이 인정받으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내 안의 영혼이,

그저 맑고 투명하게

빛나기를 바랐던 것.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모습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름은 지나갔습니다.

가을이 조용히,

아무 말 없이 곁에 와 있습니다.


그러니 이 가을—

함께 노래하며 즐거워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머지않아 우리 모두는

먼지가 될 테니까요.


그러니 오늘,

두근두근 살아 숨 쉬는 이 생명을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그저 살아내는—


그저 청순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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