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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수반짝 Oct 23. 2021

“만날 마음껏 놀아.” 차마 하지 못한 그 말

제주에서 딱 일 년 살았습니다


  “엄마, 친구들이 하교 후엔 다들 바빠. 윤소는 피아노, 발레, 영어 학원에 공부방까지 간대. 주말에도 영어 학원을 간다는데 아마도 제주 아이들은 어릴 적에, 가볼만한 곳들을 다 다녀 왔나봐. 가만히 보면, 나 같은 육지 전학생들만 주말마다 신나게 놀러를 다니더라고”    

 

 처음엔 주말에도 학원을 가는 아이들이 있다는 말에 꽤 놀랐다. 제주 아이들은 온종일 바다나 들판에서 자유롭게 뛰어놀기만 할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환상적인 자연 풍경이 만들어낸 여행자의 낭만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면 제주도민들은 자영업이나 농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아서 대부분이 맞벌이를 했고, 어쩌면 주말이 더 바쁜 듯 보였다.      


 제주에 오기 전, 나는 평일에도 하교한 아이들과 제주를 맘껏 쏘다닐 수 있을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나도 도민이 되고 보니, 아이에게 차마 “만날 마음껏 놀아”라고 말하지 못했다. 연중 삼분의 일은 비가 오는 변화무쌍한 날씨 탓도 있지만, 아이의 학교 숙제도 꽤 많았다(수학 학습지 1장과 받아쓰기 복습, 독서록이 매일 과제로 나왔다). 결국 우리는 평일은 성실하게 일상을 살기로 했다.      


 아이는 딱딱한 가정 학습지보다는 다양한 방과 후 수업을 많이 듣고 싶어 했다. 결국 우리는 다채로운 경험과 배움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덕분에 아이는 바이올린, 우쿨렐레, 교육마술, 댄스스포츠, 피아노를 일 년 동안 신나게 배웠다. 여름 방학에도 방과 후 수업을 열심히 들었고 피아노 학원도 매일 갔다. 아이는 여행객을 부러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엄마, 우리는 여름 휴가 언제가요? 아, 여행가고 싶다”     


 무엇보다 초등 저학년은 평생을 좌우지할 ‘건강한 습관’을 길러줄 적기이다. 나는 직업 특성상 또 성격상 마냥 방목하는 엄마는 될 수 없었다. 따뜻한 성품과 영성, 독서와 숙제하는 습관, 외국어 능력은 꼭 길러주고 싶었다. 딱 6개 항목만 있는 담백하고 심플한 ‘생활습관 점검표’를 만들었다. 이걸 냉장고에 붙여놓고선, 매일 ○, ☓로 체크하며 지켜가기로 했다. 


<몸과 마음, 영혼이 건강한 다솔이를 위한 생활 점검표> 

1.묵상(아침)

2.숙제 후 가방정리(하교 직후)

3.리틀팍스(숙제 후, 영어 동화 따라 읽기)

4.감사일기 쓰기(저녁 9시)

5.독서

6.이웃 사랑 실천하기(매일 한 가지 이상 실천 요망, 예시로는 동생 동화책 읽어주기, 동생 감사 일기 써 주기, 빨래 개기, 설거지, 친구나 선생님 돕기 등이 있다)   


 형식은 단순해도, 실천 항목들에는 ‘몸과 마음, 영혼의 건강’이라는 나름의 양육 목표가 쏙쏙 배어있다. 건강하게 자란 아이는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소중하게 생각한다. 덕분에 다른 사람도 존중하고 스스럼없이 도움을 주고, 받을 줄도 안다. 무엇보다 이 힘은 아이가 건강한 꿈을 꾸게 할 것이다. 또 꿈을 이뤄가는 데 뒤따르는 어려움도 거뜬히 이겨내게 하는 넉넉한 연료가 돼 줄 것이다. 


 특히 마지막 항목의 ‘이웃 사랑’을 늘 힘주어 강조했다. 자신을 불태워 따스함을 주는 연탄재처럼, 내 아이가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으로 자라가길 바란다. 인생사는 본질적으로 외롭고 쓸쓸하다. 그러기에 더 뜨겁고 신나는 발걸음으로 살아서 내 주변이라도 따뜻하게 밝혀야 한다. 그 온기는 공기처럼 널리 퍼져 아이가 사는 공간을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다솔’은 ‘사랑’이라는 의미의 고유어이다. 먼저 사랑을 충분히 누리고 그것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며 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고맙게도 아이는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며, 교내 휴지 줍기 봉사단을 꾸려서 활동 했다. 자칭 ‘휴지 집배원’이 된 5명의 천사들은 훗날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어른으로 자랄 것임을 나는 확신한다.      

 만날 마음껏 놀지 못했다. 평일은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주 가끔씩은 마음의 고삐를 풀 때도 있었다. 햇살이 푸짐하게 쏟아지면 설레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피아노 학원과 방과 후 수업을 제치고선 오름과 바다로 힘껏 달려가기도 했다. 숙제를 일찍 마친 날에는 간식 도시락을 싸서 숲속의 초록 나무의 손짓에 화답하며 “제주에 오길 참 잘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는 말랑말랑한 자연과 어깨동무를 하며 ‘여행 같은 일상’을 살았다.      



담백한 다솔이의 생활계획표

 

하교 후, 올레길 출동


행복한 아이들과 제주살이
마음껏 뛰어 노는 제주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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