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Better Days> 2019, 증국상
“This is our playground.” 우리의 세상은 참혹하고, 참혹했고, 참혹했었다. 경쟁 사회의 이면이라는 교과서적인 표현은 여전히 깊게 뿌리박혀 수많은 부작용들을 생산해내고 있고, 다수는 그저 ‘나무 말고 숲을 보라’ 따위의 허울 좋은 그림에 의지하며 적당히 흘러가는 시곗바늘에 묻어가려 노력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법 판에 떠밀리듯 쏟아지는 방관자들은 책임의 화살을 쏘는 데 시야를 가린다.
발본색원하는 대신 복도에 창살이 추가되는, 출퇴근이 존재하는 감옥과 같은 이곳에서 ‘나만 아니면 돼’의 관념은 더욱 굳어진다. 물론 나중에 내 일이 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도 난 그렇지 않을 거고, 그러니까 나만 아니면 된다.
이러한 관념을 차치하더라도,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식의 양비론 검이 적지 않게 등장하며 그 순간 가해자의 입꼬리는 날카롭게 파이며 올라간다.
전혀 접점 없어 보이는 그들의 만남은 그래서 더 아리다. 둘 다 하수구 같은 처지라는 사실이 접점이라면 접점일까. 그런 처지에서, 아니 그런 처지임에도, 첸니옌은 베이를 방관하지 않았고 그 반동으로 베이 역시 첸니옌을 방관하지 않음으로써 둘의 접점은 선으로 이어진다.
의지할 무언가가 단 하나도 없는 이곳에서 서로의 존재감은 그렇게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부모와 공권력, 이른바 어른이라 지칭되는 대상은 부재하며, 이들의 무조건 믿어라 식의 강압적 소통은 해결의 기능을 상실한다.
진정한 신뢰의 힘은 둘의 사랑으로 싹터 당장을 버틸 수 있는 보호막이 됨과 동시에, 지옥을 뚫고 나갈 삶의 돌파구로까지 진화한다. “넌 세상을 지켜. 난 너를 지킬게”란 약속은 단순한 교환의 확인을 넘어 전진의 시선을 필두로 선형적 사랑을 가시화한다.
베이는 앞의 첸니옌을, 첸니옌은 앞의 세상을 바라보고, 앞의 세상도 그 앞의 세상을 바라보고, 그 앞의 세상 또한 그 앞을 바라보아 지킴의 약속을 확장시킨다. 그렇게 우리는 약속을 지키고, 서로를 지키며, 세상을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