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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트별 Feb 08. 2021

3인 3색의 절정, <사바하>

영화 <사바하>의 주인공들

웅재

박 목사. 박웅재. 그는 관객과 동일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관찰자다. 영화의 이야기를 열고 닫는 동시에 ‘사슴동산’의 진실을 밝히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처음엔 그가 왜 가짜들을 잡으러 다니고, 왜 그렇게 사슴동산을 파헤치는 것에 온 힘을 다하는지 알 수 없다. 극 중 차 안에서 요셉에게 해주었던 ‘친구’의 이야기가 실은 본인 이야기였다는 게 잠정적으로 따라붙은 후에야, 이해의 범주에 올라선다. 누구보다도 신실했던 그에게 닥친 시련은 차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을 테다. 자신의 굳건했던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고, 세월이 흘러도 남들 앞에서 차마 그게 자신의 이야기라고 말하지 못하는 그의 속을 누가 이해할 수 있으랴.


‘신의 뜻’이라는 건 정말 무엇인가. 박 목사의 ‘가짜를 잡으러 다니는’ 행보는 누구보다도 ‘진짜 신’을 만나고 싶은 그의 내재적 바람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밑바닥 좁은 곳에서 지지고 볶고 있는데, 신께서는 대체 어디 계시냐고.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라 할 수 있는 ‘울고 있는 자’, 심지어 금화조차도 직접 만나지 못한다. 김제석과 잠시나마 마주하긴 했으나 이미 악으로 덮인 ‘신’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없을 터. 박 목사는 오늘날의 우리와 비슷한 결을 지닌 인간이지 않을까.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는, 신을 향해 간절히 기도하는, 많은 우리들처럼.



나한

광목. 정나한. 그는 결핍의 존재다. 사창가에서 태어난 그가 온전한 축복을 받았을 확률은 높지 않다. 친아버지라 할 수 있는 이는 그와 그의 어머니에게 모질게 대했을 테니, 그는 자신의 친아버지를 맨손으로 때려죽인다. 그런 그에게 있어 교도소에서 만난 ‘김제석’은 아버지 같은 존재를 넘어 진실로 ‘신’과 다름없었을 수밖에. 그때를 기점으로 그는 다시 태어난다. 자신의 아버지, 김제석을 위한 아들이자, 별이자, 악을 해치우는 용맹한 사천지왕으로. 광목은 ‘뱀 사냥’을, 자신의 행위를 의심하지 않았다. 경전의 말씀처럼 ‘뱀들의 눈은 아름답고, 뱀의 혀는 달콤할 것이니’라는 말은 무섭도록 딱 들어맞았으므로. 허나 매일 밤 악몽에 파묻힌다. 그가 쫓은 뱀들은 뱀이 아니라 그저 한 명 한 명의 죄 없는 인간들이었고, 결국 살인자에 지나지 않는 길을 계속 걸어가고 있었던 거니까.


그는 교도소에서 김제석을 만난 후로 자신의 이름을 버렸다. 설령 버리지 않았더라도, ‘나한아’라고 다정하게 불러주는 사람은 오직 어머니 한 사람이었을 테다. 그는 매일 밤 찾아오는 아이들의 ‘악몽’을 어머니의 옛 품에 안겨 견뎌낸다. 자신이 자초한 그 악몽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어머니의 자장가뿐이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지옥이다. 그런 광목이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 본 ‘울고 있는 자’의 자장가를 듣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던 건 당연지사. 아버지라 여긴 김제석의 표식을 확인했을 때, 자신의 믿음이 헛된 것임을 깨달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코끼리의 눈은 거울이라 한다. 광목은 코끼리의 눈을 보고 ‘그냥 추워 보인다’고 답한다. 그리고 그는 죽음을 앞두고도 ‘춥다’는 말 한마디만 남긴다. 그는 더 이상 사냥꾼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죽음으로, 결핍을 메워 자신만의 깨달음을 품에 안고 눈을 감은 게 아닐까. 더이상 광목이 아닌, 나한으로.



금화

이금화. 그리고 ‘울고 있는 자’. 1985년, 태어나기 14년 전부터, 아니 어쩌면 100년 전부터 이미 운명의 굴레에 묶여버린 이들. 만약 김제석이 티베트 대승 네충텐파의 예언을 듣고도 눈이 변하지 않았다면, 사슴동산도 만들지 않고 ‘뱀 사냥’도 하지 않았다면, 금화와 쌍둥이 언니는 어떻게 태어났을까? 혹여 이들이 악으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까. 예언은 빗나가지 않을 테니, 그랬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기독교식 이분법 논리에선 진리를 찾을 수 없다’, ‘불교에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욕망과 집착이 악으로 표현되는 것’. 영화에서 제시되는 이 말들은 곱씹을 가치가 있다. 불교에선 확실한 선과 악의 구분이 없다. 선이 타락하여 악이 될 수 있고, 악이 깨달음을 얻어 선이 될 수도 있다. 살고 싶은 욕망, 삶에 대한 집착이 김제석 자신을 악으로 만들었다. 뱀을 두려워한 본인이 뱀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흔히 ‘뱀’을 기분 나쁜 존재, 악한 존재로 여기곤 하나, 불교에서 뱀의 의미는 조금 다른 면도 있다. 뱀이 허물을 벗는 것을 고행 후 깨달음을 얻는 행위로 여기기도 하고, 석가모니가 수행을 할 때 그를 방해물로부터 지켜준 이도 뱀이었다. 그렇다면 한 발 더 나아가서, 어쩌면 ‘울고 있는 자’가 금화를 수호하는 뱀이고, 금화가 미륵일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김제석의 천적은 금화가 아니었을까. 금화의 ‘첫 피’ 이후, ‘울고 있는 자’는 몸의 털을 벗는다. 그리고 진정한 ‘울고 있는 자’로 탈바꿈되어 가부좌를 튼다. 이는 뱀이 허물을 벗고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석가모니가 수행을 할 때 뱀이 그를 지켜준 것처럼, ‘울고 있는 자’도 금화를 보호한 게 아닐까. 사천왕이 부처 밑에서 악신을 잡고 깨달음을 얻어 열반했듯이, ‘울고 있는 자’도 그 사천왕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아울러 금화는, 이름에서부터 김제석의 진정한 천적이 아니었을까. 예언이 현실이 된, 김제석(金)을 태워버린다(火)는, 금화(金火)의 의미 그 자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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