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오브 스틸>과 <더 보이>, 우리들의 슈퍼맨은
인류의 비극은 더이상 스크린 속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얼굴 한 뼘을 가리고 다니게 될 줄 불과 1년 전의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일상에 아주 큰 지장을 주는 바이러스는 영화에서, 한정된 러닝타임 동안만 경각심을 갖게 했지 그 바이러스가 우리와 함께 상영관 문을 열고 나오리라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물론 이 비극 목록 중 외계인 챕터까지는 현실에 당도하진 않은 듯하나, 바이러스의 예처럼 ‘있을 수 없는 일 같은 건 있을 수 없다’는 말을 아예 정설로 갖고 가는 게 차라리 속 편한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러니 현실의 ‘클라크 켄트’ 같은 존재가 지금도 어디선가 우리 모르게 외계인 침공을 막아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클라크 켄트가 지구를 지켜야’만’ 하는 이유는 없어 보인다. 지구인도 아닌 그가 대외적으로는 관련도 없는 이 행성의 인간들을 감싸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우리는 이 ‘슈퍼맨’이 우리를 지켜주는 걸 너무나 당연한 권리로 여기고 있다. 혼자서 탱, 딜, 힐 전부 가능하고, 하늘을 날 수도 있으며, 먼치킨도 이런 먼치킨이 없다(심지어 존잘이다). ‘슈퍼’ 닉값 제대로 하는, 아쉬울 거 하나도 없는 그가 우리를 지켜주는 소중한 이유이자 조건은, 크게 세 가지라 할 수 있겠다.
첫 번째로 근본이다. 고향인 크립톤 행성에서 악 그 자체인 조드 장군 무리에 반기를 들고 죽음을 맞이한 그의 친부모 태도에서 알 수 있듯 근본이 벌써부터 남다르다. 누군가를 해할 성품과는 거리가 멀다.
두 번째로 가정교육이다. 지구에 떨어진 후 켄트 부부에게 길러진 그는, 자신이 보통 인간과는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자칫하면 엇나갈 수 있었음에도, 따스한 부모 아래에서 자랐기에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아버지 조나단 켄트의 희생은, 그의 ‘올바름’을 더욱 굳게 하는 동력으로 기능했다.
세 번째로 명분이다. 근본과 가정교육의 단단한 토대는 이제 그의 지구 지키기에 더없는 설득력을 더하며, 여자친구인 로이스 레인의 존재가 거기에 쐐기를 박는다. 근본, 가정교육, 명분. 간단해 보이지만 자그마치 세 개의 콤비네이션으로 지구는 안전한 보호를 받고 있던 셈이다. 이 중 하나라도 어긋나면 비극행 급행열차 탑승은 일도 아니다.
<더 보이>의 브랜든이 그 어긋남의 사례다. 클라크와 똑같이 지구에 떨어져 비슷한 성장기를 보내지만, 정반대의 업적을 쌓는다. 일단 브랜든은 무근본이다. 그를 태우고 온 우주선은 족보를 알 수가 없으며, 별 희한한 신호를 내뿜으며 그에게 분노의 본능만을 채찍질한다. 이렇게 뿌리부터 뒤틀리니 나머지는 도미노처럼 소용없이 쓰러진다.
때문에 브랜든을 키운 브라이어 부부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 친자식처럼 듬뿍 사랑으로 키웠건만, 무근본에서 시작되는 그의 분조장과 잔인한 성향을 커버하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안으로 칼을 겨눔에 따라, 명분도 덩달아 역행하여 풍비박산이 나는 쪽으로 매듭이 지어진다. 이러한 방향으로 형성될 미래는 굳이 예상하는 게 무색할 만큼 암울하다.
과연 우리가 사는 지구엔 누가 존재하고 있을까. 클라크 켄트일까, 브랜든 브라이어일까. 제발 전자이기를, 저 태평양 너머를 향해 오늘도 간절히 그리고 공손히 절을 하는 시간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