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상>의 주인공들
구명회. 그는 괴물이다. 그 자체가 괴물일 수도 있고, 우리가 만들어낸 괴물일 수도 있다. 그는 정치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치인은 믿지 못할 인간들이라 말하곤 한다. 정치인은 표를 먹고산다. 표를 먹기 위해서는 선거를 해야 하고, 선거를 잘 치르기 위해 투표를 독려한다. 투표는 믿음이 바탕이 된 행위다. 가장 믿지 못할 인간들이, 믿음이 바탕이 된 행위 덕에 비로소 권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 참 재밌지 않은가?
구명회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우상’의 의미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다. 영화는 그를 통해 주제의식을 끌어올린다. 교회에 명회를 찾아온 의원은 그를 보고 예수라고 말한다. ‘방귀만 뀌어도 할렐루야 할 인간들 많다’는 이야기는 구명회의 이미지를 가장 직설적으로 나타내는 말임과 동시에 영화의 끝부분과 맞닿아 있다.
영화는 비극적인 사건의 원인 측에 있는 명회를 다루면서 ‘절대 악’으로 그리지 않는다. 어떤 때는 오히려 많은 도민들이 명회를 지지하는 것에 힘을 실어, 관객으로 하여금 냉정한 시선을 보내는 기회조차 차단해 버린다. 우리는 명회의 정확한 속을 알 수 없다.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 치명타가 될 것이 분명하지만 아들을 자수시키는 참된 인간으로 비춰주면서도, 뺑소니와 시체유기를 저울질하여 자신의 앞길에 유리한 쪽을 선택하는 지능적인 면모도 제시된다.
그는 죄의식이 있지만 후반부에 들어설수록 추악한 괴물의 모습으로 관객들 앞에 나타나는데, 그런 모습 역시 무작정 비판과 비난을 가할 수 없는 흐름으로 덧씌워진다. 영화 속 도민들은 그의 내면을, 진실을 알리 없고, 알았다 한들 상관없다는 식으로 그를 추앙할 것이다. 그럼 과연 우리는 그들과 다른가. 우리는 누군가를 믿고 지지함에 있어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보내는 박수와 환호성엔 무지가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의 우상은 정말로 진실된 ‘우상’인가.
유중식. 그는 아버지의 전형상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나오는 “제가 직접 해줬습니다”라는 그의 대사는 유중식이라는 인물을 뼛속까지 깊게 나타낸다. 그에게 아들 ‘부남’은 이 세상 전부였음이 틀림없다. 부남이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런 아들에게 쏟는 중식의 애정은 더 짙을 수밖에 없었고, 사고 후 핏줄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일 테다.
사실 당연하다. 어느 아버지가 자신의 아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는데 집착과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단 말인가. 문제는 그다음이다. 아들 부남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지만, 며느리 ‘련화’가 사라졌다. 그리고 련화가 임신했다는 초음파 사진이 나타난다. 중식은 곧바로 아들의 죽음에 대한 감정을 련화 뱃속 아이의 삶에 연결한다. 그 후 실종된 련화를 찾아 나서고, 영화도 그런 중식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시종일관 분노하고 슬픔에 가득 차 있던 중식이 거의 유일하게 웃음을 보이는 순간은 산부인과에서 련화 뱃속 아이를 초음파 화면으로 보는 때뿐이다. 그가 련화의 추방을 막으려 애쓰고, 그녀를 감싸는 것도 다 아이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 부남은 사실 아이를 만들 수 없었다. 중식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으므로 그도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해서 그가 련화를 찾고, 련화를 보호하려 했고, 보호를 위해 선거 유세까지 도왔던 그 당위성은 처음에 비해 희미해진다. 자신의 손자가 아닌, 핏줄이 아닌 아이에게 그는 왜 집착했을까. 련화의 말마따나 정말 외로워서 그랬을까.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노의 연장선이었을까.
관객들도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듯이 중식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무엇을 믿음으로 했는가에 대한 답을 내지 못했고, 결국 이전의 말씀을 들었던 대로 우리나라의 가장 큰 인물의 목을 날려버린다. 그는 그래서 답을 얻었을까. 중식은 우리에게 말한다. “몰랐지? 몹쓸 병에 걸렸는데 아프지 않으니까.” 이 말과 함께 겹쳐진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대로 답을 얻을 수 있을까. 아니면 답을 회피한 채 다른 청중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의심 없이 우리의 우상에게 박수와 환호성을 보내는 데 힘을 쓰는가.
최련화. 그녀는 시한폭탄이다. 련화는 그런 운명을 태어날 때부터, 아니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유일한 혈육이라 할 수 있는 수련의 말처럼 소보다도 못한 엠나(여자)에 얼라이(첩)의 딸이었으므로 유년 시절 끊임없이 생존의 위협을 거치며 살아왔다. 게다가 신분을 직접 사야 했으니 ‘련화’라는 이름도 본래 자신의 이름이 아닌, 샀거나 직접 지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존재의 가장 기본 요소라 할 수 있는 이름조차도 본인이 쟁취해야만 했던 그녀가, 사는 내내 뾰족하게 날이 서 있는 건 당연하다.
자신에게 피해를 끼치면 어떻게든 찾아가 복수를 하고, 심지어 그 피해를 느끼는 범주에는 시샘과 질투도 포함되어 친언니나 다름없는 수련의 얼굴을 흉측하게 만들어버릴 정도로 상상 이상의 잔혹함 또한 지니고 있다. ‘종자가 틀리다’는 수련의 이야기를 결코 허투루 들을 수 없는 이유다. “칼로 긁은 상처는 치료할 수 있지마는, 입 주둥아리는 아이대오.” 련화가 명회 모에게 한 이 대사는 그녀가 살아온 삶을 집약하는 결정체라 할 수 있겠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오랜 시간 동안, 더 많이, 더 잔인하게 타인의 입으로 인하여 살해당하여 왔으리라.
련화의 최우선 목적은 생존이다. 그래서 소속이 필요하고,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다. 관객들은 련화가 본격적인 등장을 하기 전엔 극이 전개될 때마다 조금씩 떨어지는 그녀에 관한 정보들을 주워 담으며 추측을 할 수밖에 없다. 헌데 사건의 핵심적인 열쇠인 줄 알았던 그녀가 서슬 퍼런 칼날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녀는 영화의 가장 큰 변수이기도 하다. 권력자와 비권력자로 오려낼 수 있는 이분법적 사회 안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최하층이지만, 권력자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존재이고 그런 권력자를 더욱 거대한 ‘우상’으로 등극시켜버리며, 더 나아가 우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영화적 장치로까지 활용된다.
련화의 마지막 행위는 결국 명회의 연설을 향한 청중들의 박수와 환호로 묻혀버리지만, 그 이면엔 그걸 보고 듣고 있을 우리의 눈과 귀에 간절하게 꽂히는 비명이 있다. 엔딩에서 박수와 환호성을 느낄지, 비명을 느낄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