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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트별 Apr 10. 2021

실(實)하지 못함에, 실(失)할 수밖에 없음에

영화 <자산어보> 2019, 이준익

열공의 아이콘

학문의 근본은 결국 이상에 있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소위 좋나의 더블 트랙이 두터운 흰 배경 위 먹색으로 빼곡하게 깔려 있는 셈이다.


그 위대한 근본이 무탈하게 실현 가능하다면야 나무랄 이 하나 없겠으나, 고일대로 고여버린 바탕이 영롱한 싹의 성장을 바스러뜨린다면, 온몸이 부서지는 와중에도 그저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만을 주야장천 바라보는 지각이 지속된다면, 절망의 맛을 음미하게 되는 수순은 어려움 없이 바짝 따라붙을 테다.



주자 이즈 베리 스트롱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세상의 운명이 아주 크게 뒤바뀔 수 있었던 기점은 분명 존재한다고 본다. 1800년 정조의 승하가 그중 하나라 믿는다. 그 기점에 만약을 붙인다면, 어쩌면 조선은 고이는 바탕에 활로를 뚫어줄 새 이상이 덧붙여져 좀 더 좋고 나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밑그림을 정약용 형제들에게서 본다. 가리키는 방향만이 아닌, 손가락부터 온몸으로 시선을 타고 가는 그들에게서. 서로 결은 다를지언정 실(實)한 이상을 추구하는 그들에게서.


행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심성은 축복일까요 아닐까요

하지만 어그러진 바탕 위에서 색이 묻어나지 않음을 잔인하게 목격하고 붙였던 만약을 떼어낸다. 시시각각 다를, 저마다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를 그러한 바탕들 위에서 그러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떤 이상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 추구한 것이 닿지 않을 때, 가로막힐 때는 어떡해야 하는가. 더불어 닿지 않아서, 가로막혀서, 행할 수 없어서 삭이지 못하는 감정을 느끼는 걸 좋다고 해야 할까 나쁘다고 해야 할까. 지금의 창대일 우리에게 보내는 전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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